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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Sep 19. 2022

호모 심비우스(공생하는 인간)

생각하는 우체통

   지난 폭우는 이제 가라앉은 것 같다. 강남에도 서초에도 집안으로, 건물로 들어가 일부러 보지 않는다면 수해로 인한 난장판은 보이지 않는다. 분업화된 사회에서 각자 자기일에 충실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장면을 원상복구시켰기 때문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지 않고서야 원상복구는 어려운데도 우린 멀쩡해보이는 장면으로 해서 지난 과오와 피해를 금세 잊고 만다. 없어졌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포항과 경주는 아직도 고생이다. 하지만 중심지향적인 한국에서 포항과 경주의 뉴스는 간혹 있을 뿐이다. 포항제철의 피해가 너무 커서 복구에 걸리는 시간, 복구까지의 피해액이 강조되고 있다. 개인의 삶은 여전히 등장하지 않는다. 지난 추석에도 생활고로 삶을 끊은 사람이 있다. 한국에서는 개인이 지워지고 있다. 없는 사람처럼.


  치매가 슬픈 병인 건 기억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기억은 때로 고통으로부터 도망가게도 하고 현재를 더욱 부각시키기도 한다. 기억이 지워진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말한다. 치매환자들은 어느 날 늘 가던 길이 사라져 갑자기 앞에 있던 길이 낯설고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기억의 길도 사라져  혼란스럽다고 한다. 그러다 익숙했던 가족의 얼굴이 사라진다. 오래전 어린 시절의 얼굴만 남아 성인이 된 사람의 얼굴은 지워져서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기억했던 일들, 본능적인 것들을 지운다. 먹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방문을 여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어디에 배설하는지 배설 후의 뒷처리를 잊어버리고, 사람으로 기본적으로 해왔던 일을 잊어버린 후 서서히 죽어간다. 한 사회에서 치매환자가 자신의 과거와 생존을 위한 방법이 사라진 것처럼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사회도 사람이 모여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사회라는 것이 하나의 생명체라면 지금 한국 사회는 치매 걸린 환자와 마찬가지 같다. 행복감이 높은 사회는 주변의 외침을 놓치지 않는다. 지워지고 사라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예사인 사회, 더 이상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낳으려는 사람이 줄어드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자연의 세계는 다정함이나 친근감, 정겨움과는 거리가 멀다.(다정함이 살아남는다 중) 다정함이 살아남는다는 책에서 인간이 살아남은 이유는 다정함이라는 정서, 공감하고 공생하기 위해 벌이는 행위들(일종의 가축화)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얼핏 약육강식이 철저하게 지켜지면서 유지되는 것처럼 알려졌다. 적자생존은 다윈의 진화론의 중심이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지구가 지금까지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외로 공생을 선택해서라는 것이 요즘의 이론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서, 학자들의 강연을 통해서 반복해서 듣게 된다. 지금 우리가 겪는 지구온난화라는 기후위기는 종의 다양성이 축소와 자본주의에 의한 무제한의 생산과 소비, 결국 인류가 스스로 생존의 위협을 만들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온 마을이 한 명의 탄생아를 키운다는 말은  서로 협력해서 아이를 돌보고 그 사회에서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해서 그들의 지식을 다시 나누는 선순환의 과정을 말한다. 그 사이에 이타심과 다정함은 필수불가결이다. 서로 종이 다른 포유류를 한 울타리에 넣어 놓으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과정에서 암놈은 출산을 멈춘다고 한다. 불안이 종의 번식을 억제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불안이 사회 전체를 잠식하고 있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 전에 나의 안위가 위협받고 누군가 나를 밟고 집어 삼키려고 하는 이 끝없는 불안.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통한 부를 축적시켰지만 결국은 물건을 만들고 사는 생산과 소비는 자본가와 소비자 모두에게 한계를 가져온다. 더 나은 물건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끝없는 소비를 촉발시키지만 결국 그럼에도 소비는 제한적이다.  고가를 지불해야 하고 기능엔 프리미엄이란 단서가 붙는다해도.  더이상 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거나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면 물건은 쌓이게 된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의 욕망에 모든 사람이 맞춰줘야만 할까.  자본가가 지속적으로 생산한다고 해서 소비도 그럴 것이라는 건 안일한 생각이다. 선진국은 이미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이제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욕망을 눌러 인간의 수명을 늘이기 위해 소비를 줄이자고 한다. 그리고 생산기지를 가난한 나라로 옮긴다. 그러고도 굴뚝의 연기는 내뿜지 말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나라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역사를 훑어 보면 부가 편중되고 돈의 흐름이 투명하지 않은 사회는 가난해진다. 한국보다 잘 살던 나라들이 지금 가난한 나라들은 대부분 부정부패와 질 낮은 교육, 기회 부족이 이유이다.  어느 나라도 예외는 없다. 그런 나라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0점과 100점의 평균은 50점이지만 60점과 70점의 평균은 65점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는 건 북유럽식 복지가 부럽다면 우리의 씨스템을 잘 살펴야 한다.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이 화를 낼 것이 아니린 우리가 낸 세금이 엉뚱한 곳으로 새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 세금은 나라 살림을 위해서 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선순환을 위해서다. 우리가 힘이 없을 때, 건강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고 건강을 회복하는 기회를 열어주고 가난해서 기회가 없던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지금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복지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실험은 그렇지 않다. 평균점수는 잘 사는 사람 소수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는 높일 수 없다.


  시간이 많이 없다고 한다. 자본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느라 더 많이 버리고 더 많이 오염시키면서까지 가난한 이를 양산하는 것이 옳은지, 더불어 같이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은지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 한국 사회는 양질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으니 더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다. 더 현명하게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할 것이다.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하는 동물들에게서조차 발현되는 이타심이 인간에겐 더 가능하지 않을까.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다 같이 더 오래 살 수 있다. 해답은 공생에 있다고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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