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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n 28. 2023

일요일의 병

생각하는 우체통

  신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돌볼 수 없어서 엄마를 보내주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이 정말 무서웠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였을까,라는 질문에 그럴 때도 있었지만 아닐 때도 있었으니까요.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불완전한 인간이고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엄마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어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역할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영화 '일요일의 병'은 모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모녀의 이야기라고 보기엔 씁쓸한 부분이 많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나벨은 부유한 집안의 안사람입니다. 그녀는 꽤 유명한 사람입니다. 사교계에서 그녀가 주관하는 파티는 꽤 유명한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이 모이는 파티가 아니니까요. 아나벨은 파티의 호스티스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줍니다. 품격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니 어떻게 행동거지를 취해야 하는지. 심지어 몸에 부착한 악세사리까지 탈착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파티가 진행됩니다. 화려한 옷과 우아한 담소를 나누는 그들, 아나벨은 가까이 다가오는 메이드에게 화이트와인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아나벨의 와이잔에 레드와인이 채워집니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개가 들어오고 그날의 파티는 아나벨의 계획과는 반대로 실패하고 맙니다. 파티가 끝난 공간에서 아나벨은 젊은 메이드를 봅니다. 젊은 날의 자신을 닮은 여성, 그녀는 자기가 8살 때 버린 딸 키아라입니다.


  영화에서 키아라는 왜 이탈리아어로 자신의 이름을 지었느냐고 묻습니다. 이탈리아어로 키아라는 '분명한'이란 뜻입니다. 아나벨은 영화배우가 자신의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을 따라했다고 대답합니다. 키아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불확실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버려진 아이가 흔히 겪는 방황과 불행은 온전히 겪은 것 같습니다. 영화 서두에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각각의 수생을 살아온 나무의 이력은 똑같은 환경이라도 다 다릅니다. 바람의 방향도 토양 속의 양분도 물의 양도. 그래서 같은 지역의 나무도 심어진 시기가 같아도 오랜 시간 지나면 키가 다르고 품이 다릅니다. 나이테를 확인하면 나이가 같을지라도. 어느 한 시기가 지나면 성인이 된 존재들은 각각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아나벨은 아나벨대로, 키아라는 키아라대로. 하지만 버림받은 키아라에겐 어린 시절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했던 시기가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열흘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길 바랍니다. 하지만 아나벨에겐 자신의 병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시선으로 그저 열흘간만 자신과 함께 보낼 것을 요구합니다. 욕망의 크기가 커서 아이와 남편을 떠났던 아나벨은 그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성취가 컸지만 그녀는 신뢰가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낳은 딸의 의도를 의심합니다. 어쩌면 버려진 딸이 자신을 죽이려할지 모른다고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두려움을 안고 어린 키아라와 살았던 곳에 온 아나벨은 손님처럼 굽니다.


  영화에서 화면이 전환하는 방식은 슬라이드 필름을 돌리는 것처럼 바뀝니다. 슬라이드 필름을 보는 장면은 영화 중간에도 등장합니다. 영상과 달리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고 그 순간을 유예시킵니다. 어쩌면 사진을 찍는 키아라는 어릴 적 엄마에게 버림받기 전의 시간으로 박제시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트릭으로 엄마와 함께 있는 사진으로 바꾼 키아라, 아나벨은 키아라의 재능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사진 속에서 매력적으로 성장한 딸 키아라. 성공한 집안에서도 딸을 낳았고 그 딸도 사진을 합니다. 두 딸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사진이란 예술에 재능, 그러나 키아라는 아나벨에게 말합니다. 이복 동생인 아나벨의 또 다른 딸을 소포처럼 미국으로 보내는 거냐는 말, 아나벨에겐 자신의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딸이 엄마 아나벨에게 보이는 반항적인 태도를 보면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딸은 지독한 통증으로 스스로 몸에 진통제 주사를 맞고 버티고 있습니다. 키아라가 엄마 아나벨에게 원한 것은 하나입니다. 세상에 자신을 내보낸 것처럼 끝도 엄마가 마치게 해줄 것을. 죽었다고 말한 아버지(아나벨의 첫 남편)는 파리에 살고 있었고 키아라를 위해서 자신이 해주고 싶다던 것을 거부했지만 엄마인 아나벨에겐 요구한 것. 죽음을 맞닥뜨린 키아라에겐 살아있는 시간이 고통이었을지 모릅니다. 왜 자신에겐 끝없는 고통과 통증이 반복되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아나벨은 딸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젊은 날 자신이 버린 남편과 아이가 기다리고 있던 집 앞의 따뜻한 불빛을 마주 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키아라의 아버지인 아나벨의 첫사랑이었던 사내가 묻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니 만족하느냐고. 아나벨은 더 원하게 되더라는 답을 돌려줍니다. 욕망은 끝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엄마의 욕망에 대해서 우린 얼마나 무감한 세월을 보냈을까요. 책임감으로 평생을 돈 버는 일에 발목이 잡힌 남성처럼 육아와 집안 살림에 발목을 잡힌 여성의 삶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것이 종족 보존을 위한 모든 생명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일지라도요. 인간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왜'라는 질문과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면서 스스로 결박을 풀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불행을 내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모릅니다. 인간의 삶에 부조리가 따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영화가 끝나면 쓸쓸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남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이 영화의 감독 라몬 살라자르는 우연히 자신이 낳은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지 않았던 여성들에 대해 쓴 이스라엘 작가의 책을 읽고 이 영화를 구성했다고 합니다. 모성이 없는 엄마에게서 연민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자신의 아이를 죽음으로 이끄는 엄마를 만날 때는 더더욱.  영화 속에서 아나벨은 결국 키아라에게 사과를 합니다. 비록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만 이미 때가 늦습니다. 늦은 후회는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후회가 너무 늦으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둥치가 큰 나무 밑의 뻥 뚫린 구멍으로 키아라와 아나벨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튼튼하고 커 보여도 구멍이 뻥 뚫린 채 공허하기만 합니다.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습니다.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어떤 기억은 자리를 옮겨 우리가 살게끔 도와주는데, 어떤 기억은 침체되어 있지.

게다가 너무 강력해서 그걸 움직이지 못하면 우리가 끌려 내려가.”

  


      

                                            다음에서 이미지를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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