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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n 23. 2023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고

책 읽는 우체통

    '야만인'의 정의는 무엇일까. 백여 년 전 대한제국 땅에 도착한 서양인들은 조선에 사는 이들이 야만인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지금까지도 개 식용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했을 것이다. 백여년 전 사진을 보니 여성 중 저고리 밑으로 가슴을 드러내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사는 곳은 또 얼마나 열악한지, 사진 속의 조선은 특히 서민층의 삶을 보면 야만인이 따로 없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서양에 밝혀지는 한국에 대한 사실, 야만인일지 몰랐던 조선의 사람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자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 문화를 형성하고 부침이 있었지만 이웃과의 교역이나 외교 모든 면에서 자신들만의 고집과 철학을 갖고 역사를 일구었던 것이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던 역사가. '야만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야만인은 무엇일까.


  JM쿳시는 노벨상 수상작가다. 그의 작품을 지금에서야 읽는다.  책을 덮으니 가슴이 저린다.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고 한동안 먹먹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전쟁이 끝난 후 동남아의 정글에 버려진 일본군들, 자신의 동료가 죽어가고 살기 위해 동료의 시체를 먹고 버텨야만 살 수 있었던 전쟁의 비극은 한동안 일본 정부와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만 미워하자는 마음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된 책이었다. 

  다수의 사람이 희생되는 배경 뒤에는 결국 다수의 선택권이 없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다. 선택권이 있는 사람들,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의 부조리함을 고발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의 부당함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 결국 지식인들일 텐데,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고민하고 저항하고 반대했을까. 작가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지만 지식인으로서 그런 질문을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책의 내용은 정복지에서 치안판사를 하는 화자가 '야만인 포로'인 그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상처와 몸의 불구가 된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시작된다. 전쟁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을 재판하고 형벌을 내리던 판사라는 직업, 기득권이었고 정복자 중 하나로 정복지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사람이 그 여자의 깊이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상처를 보고서야 그는 정복자들의 행태를 보게 된다. 그녀의 상처를 씻겨주면서 그녀의 옆에서 잠을 청하면서 그녀에게 성적 욕구가 쏟아지기 보다는 그녀 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화자는 결국 그녀를 야만인들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병사들과 열악한 환경을 딛고 여자를 돌려보내준 뒤 돌아온 다음 그는 야만인들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야만인은 누구인가. 침략의 명분은 문명의 전달, 야만인의 교화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침략은 문명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약탈, 겁탈, 폭력, 살인, 파괴일 뿐이었다. 토착민들만의 문화와 그들의 삶의 방식, 그 안에서 소소하게 삶의 가치를 깨우치며 사는 사람들의 터전을 짓밟는 것 문명이 야만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좋은 소설은 그 배경을 언제로 하든, 공간을 어디로 옮기든 인간의 삶에서 결국 던지게 되는 질문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쿳시는 네덜란드계 백인으로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주의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난하고 작업을 통해서 그것이 정당하지 못함을 고민하는 소설을 줄곧 쓴 작가다. '제국은 타자가 있어야 정의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제국은 타자의 존재 여부에 상관 없이, 그것의 존속을 위해 타자를 만들어내야 한다.' 해설 부분의 이 지적은 19세기 말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의 논리와 비슷하다. 문명화되지 못한 조선을 침략한 것을 개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더럽고 문화적 열등생이었던 조선의 사람들에게 서구화된 문화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야만인 조선이라는 타자가 계속 필요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이 갖고 온 비극을 돌아보면 폐허와 시체와 상처뿐이다. 조작된 정보와 고문과 세뇌를 통해서 자신들의 침략을 영속시키고 싶어했던 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폐허를 눈앞에 보게 됐었으니(히로시마, 나가사키원폭) 얼마나 비극인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피해만 말하고 그들의 가해는 말하지 않는다. 쿳시의 소설은 남아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식민지 전쟁을 벌였던 야수의 시대만을 말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야수의 논리를 갖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나라들과의 전쟁을 서슴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언제나 불안하다.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그걸 알고 있죠.p14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편하게 먹고 사는 나에게는 여가 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한가하고 잘못된 짓이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p32


  그러나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와 내가 잠을 자는 사이 밤사이에 끔찍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자칼은 토끼의 내장을 찢어발기지만 세상은 돌아간다.p41


  나와 고문자들, 딱정벌레처럼 어두운 지하실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어떻게 내가 침대는 결코 침대가 아니고 여자의 몸은 결코 쾌락의 장소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고 나는 주장해야 한다. 그가 저지른 범죄 때문에 고통을 받지는 않겠다. 


  이 여정이 끝나면 우리는 모두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질릴 것이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싶었다.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더 의심스러운 동기가 섞였다 해도, 좋은 마음으로 했다는 걸 부인하게 않겠다. 참회와 보상을 위한 여지는 언제나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p135


  야만인들을 위한 정의라는 명분을 옹호하는 것보다 단두대에 머리를 놓는 게 더 쉽다. p178


  이 나뭇조각들은 결국 알레고리가 되죠. 순서를 달리하면 다양하게 읽을 수 있소. 게다가 나뭇조각 하나만 해도 수 많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소. p185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게 된다. p229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그럴 것이 아니라. p241


  우리는 집안에 앉아, 의지할 데라곤 전혀 없이 벌판에서 바람을 등진채 견뎌야 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 생각한다.p253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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