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체통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한 사내가 있다. 그의 부모는 농사를 지으며 아들이 농사라는 가업을 잇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든 20세기 초의 농업은 새로운 전기를 필요로 한다. 현명하고 묵직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농법이 나올지 모른다며 새 시대의 농업기술을 배우라고 아들을 대학교에 보낸다. 그렇게 스토너 집안의 아들인 주인공이 미주리 대학에 입학한다. 농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2학년에 우연히 듣게 된 영문학 수업에서 아처 슬론 교수를 만나게 된다. 소네트에 대해서 아느냐는 그의 날카로운 질문과 그의 수업에서 만나게 된 문학에의 열망,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졸업을 앞둔 그는 부모의 기대에 반하는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과 집으로 귀향하지 않고 계속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스토너는 종신 교수였지만 정교수가 아니었다. 그는 아내 이디스를 사랑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열정을 다해 썼다고 생각했던 책은 출간되자 그다지 성공한 책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때로 열정적인 교수로 존경받기도 했지만 로멕스 교수와의 실랑이 이후 조롱받기도 했다. 이디스와의 사이에서 아름다운 딸 그레디스가 태어나 아이가 성장하며 이디스가 주지 않은 사랑을 아이에게 주었지만 어느 날 이디스는 스토너에게서 아이를 빼앗아간다. 대학원생 찰스 워커는 지도교수인 로멕스를 등에 업고 스토너를 곤경에 빠뜨린다. 사랑했던 캐서린과의 관계를 폭로하며 교수로서의 직위를 위협하는 로멕스 때문에 캐서린은 떠난다. 학과장이 된 로멕스는 찰스 워커의 일로 스토너에게 1,2학년 기초 수업만을 편성한다. 스토너는 평생 자신의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다만 아버지에게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말한 게 전부였다. 그에겐 전쟁에서 죽은 데이비스와 고든 핀치만이 친구였다. 지지자도 별로 없었고 추종자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자신이 사랑했던 학문에 매진했으며 아내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가정을 깨지 않았으며 찰스 워커라는 교활한 학생이 학위를 따는데 편법을 쓸 때는 강경하게 소신을 밝혔다. 그는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어느 누구보다 타인을 상처 입히지 않으며 소신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캐서린과 불륜에 빠졌을 때조차 그의 고독한 평생을 읽었던 독자인 나는 미워할 수 없었다.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열정을 기대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토너의 사랑은 평생의 유일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책을 덮으며 책의 표지에 적힌 말처럼 내가 스토너처럼 느껴졌다. 지지자도 없이 평생을 살아간 한 남자의 일생의 기록 같은 소설이. 하지만 내겐 따뜻한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격려해줬던 주변인들과 선택이 가능했던 시간들이 스쳐갔다. 그럼에도 왜 내가 스토너처럼 느껴졌을까. 우리는 삶의 비극을 따뜻한 순간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기억으로 가끔 가슴의 통증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내 편이 아니었던 시간들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며 닥친 문제들 앞에서 절망하고 꺾인 순간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들던가. 옳지 않은 일을 자리에 연연해서 묵과한 적은 얼마나 많은가. 타협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비열한 순간들과 사람들과 악수했던 시간들은 헤아릴 수가 없을 수도 있다. 자신이 얻은 기득권을 이용해서 타인에게 솔직하지 못한 적은 얼마나 많은가. 스토너는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선택을 했고 그렇게 평생을 살 수 있었던 강단이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심지어 딸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비난하거나 참견하지 않는다. 딸을 빼앗기는 순간 이디스에게 호통을 친다거나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이디스의 선택을 따라줬다. 그럼에도 책을 읽으며 드는 반발심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디스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로멕스는 정말로 비열한 악마일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기도 하지만 어차피 작가는 관찰자로 스토너를 중심으로 소설을 썼으니 그를 중심으로 인간 소터너를 관찰하고자 한다.
평생을 통해 스토너가 보여준 행동은 자칫 무기력한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다. 무기력이란 게 무엇일까. 그냥 어떤 사람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스토너는 무기력했던 사람이 맞다. 그러나 그가 교수로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봤을 때 그는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었다. 찰스 워커의 반칙을 용서하지 않았고 책을 내기 위해서 연구했고 대학원생의 논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수업이 존중받지 못했을 때 스스로 제대로 수업 배정을 받을 수 있도록 행동했다. 그가 어떤 선택을 존중했던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일 뿐이었다. 이디스가 잠자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했을 때 그녀의 선택을 받아주며 이디스가 돌보지 않는 그래디스를 사랑으로 돌보았다. 아이의 식사를 챙기고 옷을 입히고 자신이 일하는 서재에서 책을 읽히고. 그보다 더 좋은 부모의 역할이 있던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엄마 노릇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디스와 스토너는 다투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따랐다. 다만 그래디스가 겪을 독선으로 인한 고통에 대해 마음 아파하며 그래디스와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때 스토너는 절망했다. 캐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을 때 그는 캐서린과 모든 일을 함께 공유하며 방법을 찾아가려 했고 그 결과는 캐서린의 선택으로 정해졌다. 스토너가 받은 상처가 가장 클 것이었다. 이기적인 이디스는 왜 그토록 불행한 결혼생활을 자초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녀가 스토너에 대한 예의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세상에 설명이 되는 행동보다 설명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더 많으니(어릴적 트라우마를 들춰내며 심리적 해석을 하기엔 이야기의 중심은 스토너니까) 예외로 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1965년에 출간된 이 책은 50년이 지나 다시 세상에 나왔다. 한 사람의 일대기처럼 지루하고 재미없는 소설이 있을까. 이 소설은 숨을 멎을 듯한 긴장감이나 스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을 이틀 만에 다 읽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우리는 흔히 삶을 견뎌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사람에게 존엄이란 게 존재할까, 싶은 순간이 많다. 그런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충실하게 평생을 헌신하는 것, 그리고 어느 날 끝이 보일 때 후회 없이 헌신했던 삶을 털어내는 지혜를 발휘해보라고.
어제는 집에 가는 길에 죽은 나비를 보았다. 그 나비 밑을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개미 한 마리와. 작년에는 딱정벌레를 수십 마리의 개미가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나비와 개미를 보고 지금 개미가 견적을 뽑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개미는 동료 몇 마리를 불러야 이 나비를 끌고 갈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몸의 수십 배의 크기인 나비를 끌고 가는 개미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삶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자기 몸이 버텨내기 어려운 무게의 짐을 지고 가는 게 인생이라고. 그래서 삶은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 엔도 수샤쿠의 <깊은 강>을 읽었을 때 나는 슬프면서도 감동스러웠다. 견뎌내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갠지스강에서의 깨달음. 사는 건 순간순간 얻게 되는 그 깨달음으로 우린 버티는 것인지 모른다. ‘스토너’를 덮으며 오래 전에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산다는 것의 무게와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던 작가의 깊은 내면이 소리없는 파장으로 전달되는 걸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