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주 Oct 26. 2023

평화를 바라는 일요일의 루틴

생각하는 우체통

  나는 아주 어릴 때 영세를 받았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주교가 나의 종교가 되었다. 영세를 받은 나는 털코트를 입고 신부님 옆에서 눈이 안보이게 웃고 있다. 사진 속의 어린 소녀도 예쁘지만 엄마의 얼굴이 참 아름답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 엄마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어린 남매의 온전한 부모로 버티기 위해서 종교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시 보니 엄마의 얼굴이 아름답지만 어둡다.      


  어릴 때 영세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던 나는 첫영성체를 받아야 했다. 보통은 초등학교 다닐 때 하지만 나는 좀 늦은 중학생 때 했다. 성당에 가라고 헌금을 주시면 나는 성당 가는 길에 있는 만화방에서 한 시간을 만화를 보다 갔다. 헌금이 그렇게 써졌지만 신앙심이 없던 나는 죄의식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꿈에서 성당이 보였고 성모님이 보였다. 만화방에 가다간 벌을 받을 거 같았다. 중학교에 들어가 첫영성체를 받은 까닭이었다. 이후 내게는 솟구치는 신앙심과 거룩함으로 가득 찼다. 꿈을 꾸었고 평생 종교에 봉사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속물적 욕망이 가득한 내겐 요원한 꿈이었다.     


  엄마가 종교생활을 시작한 것은 마음 붙일 데가 없어서였고 이런저런 부조리함을 견디기 힘든 내게 종교는 성스럽고 거룩한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선물했다. 엄마처럼 혹은 나처럼 종교는 많은 가난한 이들의 피난처였고 위안처였다. 성당 한구석에 놓여있는 항아리엔 항상 쌀이 담겨 있었고 누군가 그걸 퍼갔으며 누군가는 그 안에 다시 가득 채워 넣었다. 만화방에서 소비되던 현금은 성당의 헌금통에 들어갔고 나는 그 돈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써진다고 굳게 믿었다. 교회와 성당이 커지는 걸 보면서 또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이 아빠의 차로, 혹은 아파트 이름으로 끼리끼리 모여 노는 걸 걱정했다. 얄팍한 나의 신앙심은 종이짝보다 더 얇아서 쉽게 찢어지고 남루해졌다.      


  아름답지만 슬픈 미소를 짓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나의 간당간당했던 신앙생활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도 마음 붙일 데가 없고 외롭고 힘들었다. 엄마처럼 나는 슬프게 웃었고 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종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성당의 규모는 커졌으나 신자들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내가 다시 다니기 시작했던 지방의 성당도 서울의 대형 성당이었던 곳도 신자들의 수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였다. 물신주의가 팽배해서 그러나. 그러다 어느 날 주보에서 발견한 미국의 고등학교에 어학 캠프 참가안내 광고글을 봤다. 내가 알기로 현재 미국 물가가 엄청 올라 체류기간 동안 교육비와 체류비가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씁쓸해진다.     


  종교가 사람들의 삶에 깊이 들어오게 된 것은 현재 인간이 겪는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 철학적 고찰을 통해 첫 번째, 모든 일의 근본을 따졌을 때 ‘신’이 있다는 종교철학자의 가설은 수많은 반론을 통해서 ‘신이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증명할 수 없음으로 해서 신은 없다는 결론까지 다양한 철학적 논증과 토론을 유출한다. 그럼에도 종교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이며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그 이면에 정치와 이익이라는 숨은 목적이 숨어 있지만, 개개인에게 있어 종교가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삶의 지난함,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불행과 슬픔, 고통으로 가득 찬 삶 때문일 것이다. 종교가 가장 위력을 발휘하던 시기를 지나 과학이 힘을 발휘하고 빛이 더 이상 신의 영역이 아니라 양자물리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신께 의지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종교는 가난한 이들의 편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서 위로받고 고통스런 삶을 지나 죽음 이후의 하느님의 세계에서 받을 영광으로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과학이 아무리 뛰어난 수학적 증명을 통해 하느님의 기록을 부서뜨린다고 해도 인간에게 종교가 마지막 보루처럼 남아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교는 세상을 더 분열시키고 희망을 앗아가고 빈부의 격차를 더 격렬하게 느끼게 하는 수단이 되어가는 세상이 참으로 안타깝다. 평화를 빈다면, 사람을 사랑한다면 종교에 귀의해 살아가는 종교인들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텐데, 그들부터 물질의 노예처럼 변해가니. 힘없고 마음 붙일 데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 기댈까. 어머니의 슬픈 미소 안에 숨어있던 편안함이 종교가 가진 가장 큰 힘이었는데. 마음의 평화를 바라는 나의 일요일의 루틴 속의 기도가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