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우체통
언젠가 지하도를 지나갈 때였다. 지하도 계단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질 않았다. 무정하게도 흘끔 쳐다보지도 않는 거였다. 사는 게 바빠서였을까. 왕래가 많지 않은 지하도라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마음이 쓰였다. 나는 일행이 있었고 함께 있었던 친구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저 할머니가 예수님일 수도 있어.’
어린 나이에 친구의 신심을 빌어 할머니를 도와주자고 말했다.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고 안전한 곳까지 모시고 가기까지 삼십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우리는 약속을 놓쳤고 휴대폰이 없는 때라 연락이 되질 않았다. 다행이 함께 만나기로 했던 일행 몇이 같이 있어 그 일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가끔 길을 가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기사가 방송되거나 유툽에 올라오는 걸 본다. 선량한 사람들의 선한 행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모른 척 지나치려다 마음이 켕겨서 다시 갔던 나, 신앙심 때문에 도와주길 나섰던 친구의 망설임, 우린 선함과 무심함의 경계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했을까.
나이를 먹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이젠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에 사람이 생존하기 위한 환경은 더욱 척박해졌고 선함을 강요하기에도 악함을 비난하기에도 너무 많은 게 혼재되어 있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가는 생존을 위협받는 세상이 됐고 적당히 악하게 행동해야 성공과 경제적 부를 취득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전에 나는 부동산 투자를 부도덕하게 보았다. 비를 피하고 추위를 피하고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부의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을 경멸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투전판과 같은 부동산광풍에도 비켜있었고 고위험 투자 금융과도 거리를 두었다. 일정금액을 저축했고 그것이 내가 축적한 부의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와는 상당한 거리를 둔 소위 부자인 친구들과 사는 단위가 달라졌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경제적 인간이란 신조어가 나올 만큼 경제에 대한 지식과 투자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 똑똑하게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기보다 어렵다’는 성경구절처럼 부자들이 이룩한 부가 분명 나쁜 짓을 해서 얻은 것이란 편견의 시대는 지났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세상의 선과 악의 구분이, 그 경계가 많은 부분 흐릿해진다. 이젠 악한 사람은 타인에게 물리적 해를 끼치는 사람(주로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으로 좁혀졌고 선한 사람은 바보처럼 취급하는 시대까지 왔다. 남에게 너무 많은 것을 퍼주는 사람을 성격적 결핍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자존감이 강하고 외유내강의 사람들은 흔히 무조건적으로 퍼주는 것을 경계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종종 타인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미담의 주인공들이 방송에 나오면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했을 때 나는 박수를 받을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친한 동생에게 ‘사람들이 요구하지 않는 친절까지 베풀 필요가 없다. 너만 다친다’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대신에 친해지면 내 일처럼 도와주는 내가 그 일로 상처받는 일이 잦아지자 날 걱정해서 해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토록 씁쓸하던지. 그런 일들을 반복해서 겪다보면 더 이상 내 마음의 여유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없어진다. 기대도 없어지고 여유도 없어지는 관계들.
무수하게 많은 관계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조언과 동영상들이 어느 순간 위로가 되지 않고 그것이 공해처럼 느껴진다. 혼자 있길 두려워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너무 마음을 주지 말 것이며 상처받았을 때 쉽게 회복탄력성을 갖고 잊어버릴 것을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의 말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점점 삭막해지는구나 싶다. 누군가 요즘 아이 키우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중 하나가 부탁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잠깐의 외출에 이웃에게 부탁하고 나갔던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정말 요새 삭막하다 싶다.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이젠 구부하지 않으려고 한다. 착한 사람들이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현명한 태도를 취하느라 쉽게 선행을 베풀길 꺼려한다. 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 한국, 특히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밟고 올라가는 것도 뒤에서 험담을 하는 것도 예사로 생각하기 쉽다. 어떤 기사에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쏘시오패스에 가깝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타인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고 성공의 들러리로 삼는 나르시스트에 대한 경계의 영상도 엄청 많이 올라온다. 이전이라면 그들은 모두 악인이었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은 모두 악인일까. 그렇게 수학적 공식으로 판단하면 오류가 날 것이다. 그럼에도 점점 외롭고 소외되는 마음이 커지는 사람들, 정 많고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사막과 같은 혹은 호모이코노미쿠스의 정글은 참으로 버겁다.
흔히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부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에 많이 인용되는 것이 톨스토이의 ‘사람에겐 얼마큼의 땅이 필요할까’라는 이야기다. 욕심 많은 바흠이 결국 얻은 것이 자신의 몸이 들어갈 묘지의 크기. 사람들은 욕심이 화를 부르고 관계를 허물어뜨리고 삶을 피폐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하루종일 걷다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첫 시발점으로 돌아온 바흠처럼. 선과 악을 나누는 많은 일들이 이익 관계에서 벌어지는 걸 많이 본다. 타인의 이익이 내겐 손해가 되고 내 이익이 타인에게 불행이 되는 이 끝없는 돈과의 전쟁, 선과 악을 나누는 건 종교일까, 인간의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