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체통
자기 자신을 심판함 없이 남을 심판하기란 불가능한 일인즉, 남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우선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판자는 모두 마침내 죄인이 되고 마니까. /알베르 카뮈(전락 중)
살면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타인이 모두 알 수 있는 실수일 때도 있고 나만 아는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실수가 아닌 악의적인 마음이 담긴 실수라면 이건 죄악입니다. 소설 ‘속죄’는 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남산에서 누군가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는다는 말은 개구리 대신 사람으로 바꿔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나비효과는 바로 이런 걸 말합니다. 사소한 행위가 엄청난 결과를 유발하는 일들, 우리는 그걸 실수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열세 살의 브라이어니가 연인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한 행위는 무엇일까요. 실수일까요, 아니면 악의적인 모함이었을까요. atonement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이안 매큐언의 ‘속죄’는 작가를 꿈꾸는 13살의 소녀의 상상에서 시작됩니다. 창문 넘어 세실리아와 로비의 모습을 본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합니다. 그들의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브라이어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상상을 하기 시작하고 그 상상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로 이끕니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액자 소설로서 독자를 기가 막히게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고 책을 다 덮은 후에야 우리가 읽은 소설이 브라이어니의 속죄로 쓰여진 고백적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브라이어니의 입을 통해, 실제 작가인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통해 두 개의 상황을 동시에 접하게 됩니다. 현실적인 결과물인 실제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쓴 상황과 브라이어니가 쓴 작품 속에 스스로의 속죄로 그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마지막 진술에서 독자들은 우리가 정말로 소설 속에서 만나고 싶은 결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독자로서 행복한 결말을 좋아한다는 것을 소설을 덮고서 알았습니다. 왜 내가 글을 쓰면 이상적인 글을 쓰는지에 대한 답을 찾은 듯도 합니다. 하지만 소설이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생각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 학살 그 외에도 인간의 이기심으로 빚어낸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했던 사건들의 이면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판단에 있습니다. 인간의 선택과 판단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삶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교육이 필요하고 선과 도덕의 문제에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찾았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고등한 동물로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는 건 지능과 사유라는 두 개의 기능을 적절히 사용 가능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요? 인간이 가장 고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소설을 읽다가 문득 우리는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고 그것이 몇 가정을 파괴하는지 알게 됩니다. 잘못된 판단은 브라이어니의 상상이 빚어낸 거짓 증언이었지만 그것을 끌어낸 것은 롤라의 이기심과 폴 마샬의 폭력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욕망에 이용당한 브라이어니의 속죄는 그녀가 잘못을 시인했을 때에는 이미 그토록 사랑하던 두 젊은 남녀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사적인 사건이 그 일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기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빚어낸 비극이 허탈한 것은 인간의 역사에 이러한 일들이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멸종의 길을 택하는 인간의 이기심, 인류세의 종말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지 모릅니다. 브라이어니는 소설로 속죄의 마음을 담았지만 끊임없이 욕망하고 파괴하며 관계를 사회를 지구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이 어리석음은 어디에 가서 속죄해야 할까요. 책을 덮고 알면서도 짓고 있는 우리의 이기적 잘못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까뮈가 전락에서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진실은 빛과 같아서 눈을 아찔하게 합니다. 거짓말은 반대로 아름다운 황혼과 같아서 모든 것을 뚜렷하게 해줍니다. ' 그래서 우린 거짓에 더 다가가는 걸까요?
이십억 명의 사람들이 이십억 개의 목소리와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이십억 개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었다.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도 특별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누구도 하찮음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었다. p61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에 대한 몰이해와 불행을 불렀다. 그리고 오직 소설에서만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모두가 똑같이 가치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에 필요한 유일한 교훈이었다. p67
또한 그녀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익과 남에 대한 친절이 별개의 것이 아닐 때가 제일 좋은 법이었다.p110
죄책감은 자학의 도구를 끊임없이 정렬했고 시간이 가면서 떠오르는 세밀한 기억의 구슬들을 하나하나 실에 꿰어 평생동안 돌리면서 기도해야 할 묵주를 만들어놓았다. p255
인간은 누구나 물질적 존재라는 것,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 간호사로서 그녀는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전쟁터를 보고 있었다. p435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에게도 소설가에게도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며,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다. 오직 속죄를 위한 노력만이 존재할 뿐이다.P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