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새책이 나왔다. '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주문했다. 그의 책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를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그와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주문할 수 있었던 건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내가 빠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 수도 없이 이야기한 게 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잊지 않으면 안된다고. 아이들은 그 까닭에 대해서 늘 묻곤 했다. 나의 대답은 늘 일관적이었다. 우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걸. 물론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지만 핵심은 그 말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확인하기 전에는 미지의 존재, 부재의 생명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식할 때에야 존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셈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자존의 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 까닭이 아닐까. 쉽게 부재가 되는, 지워지는, 무시되는 존재로서의 불안감, 직관적으로 일상에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대명제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생명이란 점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에서 나비부족의 언어로 인사를 할 때 'I see you'라 말하는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영어를 공부한 뒤 '보다'의 의미로 영어로 see, look, watch가 있지만 단어 하나 하나가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왜 감독은 인사말의 대사를 see라는 단어를 썼을까. 우리가 보는 것의 실체를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눈을 상대의 눈에 맞추고 인사를 하는 것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우린 이미 영화를 통해서 알고 있다.
인간은 쪼개고 쪼개면 결국 원소 기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입자들이 모여 세포와 조직이, 혈관과 근육과 뼈와 피부와 그리고 뇌, 그 안의 치밀한 시냅스와 혈관들 그를 둘러싼 단단한 뼈, 그리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기계적 메커니즘을 우린 과학으로 설명하지만 설명되지 않은 영역도 여전히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도 본질적인 문제를 쫓는 학자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질문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 기원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느냐, 결국 물음표로 남겨놓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설명하기 힘든 존재로서의 인간(물론 뇌를 제외한 모든 조직은 생물학적으로 분석되고 해석되고 있지만)은 그래서 여전히 물음표이다. 사람을 만나면서 때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우리 동네에는 다세대 가구가 많다. 아파트 단지 속에 다세대 주택과 원룸이 많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산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들 속에 섞여 지하철을 나가면 그들은 낮은 층의 원룸촌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긴다. 때로 수많은 원룸과 다세대 주택을 지나다 보면 주차장에 정차되어 있는 외제차를 본다. 고가의 외제차를 원룸에 사는 사람이 혹은 다세대 주택에 사는 사람이 타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가 편견으로 가득찬 사람일지 모른다. 어떤 집에 살든, 어떤 차를 몰든 그건 선택하는 사람의 몫이니까. 결국 나도 보이는 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명품 가방이나 번듯한 의상을 입지 않고 백화점에 가면 쳐다보지도 않은 매장 직원의 태도 때문에 당황한 적 있었던 경험은 쉽지 않게 겪는 일이다. 우리가 보는 것과 뇌가 인지하는 것과의 괴리, 삶에는 함정처럼 그저 눈으로 보는 것으로 판단함의 위험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린 쉽게 그가 사는 곳, 들고 있는 가방, 걸친 옷들 등으로 판단하고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하려는 태도를 정한다. 그리고 그런 판단에 익숙한 곳이 우리가 사는 나라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양자역학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재미있게도 나는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인문학적 접근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오래 속이지 못하고 여러 사람을 동시에 속이지 못한다고 하지만 우린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람의 실체를 한참 뒤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속을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인간의 속내, 오죽하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을까. 보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인간이 그 실체를 알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혹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해야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보는 세상이 실재하는 것인지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