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우체통
민중서림에서 나온 이희승편저로 나온 국어대사전에서 '어른'이란 말을 찾아보면 중세어 얼운에서 유래한다. 성인을 뜻하고, 지위나 항렬이 높은 사람, 장가들거나 시집간 사람, 나이 많은 사람의 경칭이다. 이 항목 아래 몇 개의 속담도 함께 실려 있다. 이를테면 버릇없고 방탕한 이를 두고 "어른 없는 데서 자라났다"라고 하고, "어른도 한 그릇, 아이도 한 그릇"은 어른과 아이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전이 너무 두꺼워 베개로도 쓰기 어렵지만, 버리지 못하고 종종 펼쳐보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우리말의 참뜻과 조상의 지혜 때문이다. 어른’이라는 단어를 다시 들여다보니 무릎을 치게 된다. 역시, 우리 선조들은 다르다.
영어에서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기준이 주로 체격이나 나이 같은 생물학적 분류라면, 한국어에서 ‘어른’은 단지 나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어른스럽다’, ‘어른 노릇’이라는 말이 따로 존재하는 이유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른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울 것이 있고 성찰할 줄 알아야 비로소 어른인 것이다.
'어른 역할'이 쉽지는 않다. 며칠 전,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나도 모르게 "게으른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몸이 아플 때 집안을 치우고 싶어도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았던 시기를 겪었던 나. 그땐 무기력이 반복됐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편견에 가득 찬 언어를 사용한 셈이었다. 그날 이후 참 부끄러웠다. 어른이라면 말과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닿는 순간, 그것이 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미 수습할 수 없는 것이다.
맹자가 말한 인간이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을 가리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라고 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에 해당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에 해당하는 말로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또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에 해당하며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을 말하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知)에 해당하며 옳고 그름을 알고 옳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세상이 변했다고, 이제는 이런 말을 하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생명과 다른 이유는, 이런 마음을 지키려는 노력 덕분 아닐까. 교육과 배움은 결국 이런 덕목을 익히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세상일의 부정함에 화를 내면 통증을 느낀다. 화가 머리로 솟구쳐 얼굴이 벌게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똑같이 심장이 뛰더라도 사랑에 설렐 때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성숙한 인간’이란 뜻의 그리고 ‘어른’이란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수련하고 배우며, 인간답게 살기 위한 과정 그 자체 아닐까. 애정을 쏟은 개도 주인을 향해 사랑과 존중을 보이는데, 인간이 되어서도 인간답지 못한 이가 많은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 날 본 카툰이 떠오른다. 반쯤은 동물의 얼굴을 한 인간이 거리 위를 걷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인간 세계를 비판한 우화였지만 지금의 세상과도 겹쳐진다. 이런 소설이 오래도록 명작인 이유는,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한 사람의 어른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 김장하 어르신이나 문형배 재판관 같은 분들은 그래서 귀하다. 세상이 혼탁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전에 실린 '어른'으로서의 어른이 되는 건 어렵지 않다. 젊은이라도 스스로를 성찰하고, 공부하며, 부끄러움을 알면 된다. 오히려 어려운 건 "내가 누군데"라는 교만, 그리고 "내 것을 놓고 싶지 않은 욕심"이다. 어른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비록 편견에 가득 찬 말로 상처를 주었을지라도, 그걸 돌아보고 부끄러워할 줄 안다면. 나도 어른이 되는 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