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 전 주의사항 1. 마음을 공부하는 동료들에게
*내담자는 Intake Session을 가진 후, 자신이 처음 만난 그 분석가와 작업을 이어갈지, 혹은 다른 분석가를 요청할지, 혹은 분석 공간에 가는 자체의 자극이 어려워 분석을 유보할지 등을 결정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 글을 포함한 앞으로 몇 편의 글은 이 글을 접하실 독자분들을 몇 그룹으로 나누고, 글을 본격적으로 나누기 전에 유의사항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이 글 읽기를 계속할지, 혹은 중단할지, 또 읽는 다면 어떤 자세로 임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은 Intake Session 후 내담자의 분석을 지속할지 고민의 시간에 비유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글은 아마도 글을 접하실 대부분의 분들, 즉 정신분석을 포함한 다양한 심리학을 공부하고 계신 학도들에게 보내는 당부입니다.
보스턴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주변에서 정신분석을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두 번 토요일이면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외부인에게 공개되는 정신분석 교육 행사가 열렸고, 주변 학교에서도 관련 도서가 발간되면 출간회도 심심치 않게 열렸다. 사례 세미나는 너무 많아서 다 참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주말을 빌려 뉴욕에서 열리던 연례 세미나는 여행비까지 꽤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되도록 참석하려고 했다.
소수 학문인 정신분석학에서 뭐 그렇게 여러 학파가 있을까 싶겠지만, 각 학회마다 미묘한 접근법의 차이를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접근법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그 안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랐다. 보스턴 안에 있으면 정신분석학은 소수 학문이라기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그 정보들로 이루어진 대서양에 띄워진 작은 배 같았다. 널려 있는 정신분석학적 지식을 다양하게 섭취할 수 있는 이 경험은 마치 너무 많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떠나온 뷔페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건 정신분석이 아닌데...”
도장깨기 하듯 열심히 이런 행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종종 뭔가 찜찜한 잔여감이 남곤 했다. 미묘하게 핵심이 비껴간 것 같은 느낌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씁쓸해하며 생각할 거리를 한가득 안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비껴나간 느낌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정신분석은 무엇인가? 중앙에 명중한 화살 같은 그 느낌을 주는 정신분석은 무엇일까?”에 매달리며 더욱 열심히 이런 행사들을 찾아다녔다.
얼마 전, 미술 작품과 정신분석을 결합한 세미나가 열린다고 해서 다녀온 일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SNS 스토리를 넘기다가 떡하니 이 세미나 광고가 뜬 것이다. 그림과 정신분석이라니,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니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기’를 주제로 한 미술 작품 감상과 정신분석학자가 이끄는 토크가 함께 이루어지는 행사였다.
행사장에 들어서자 참가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게, 대부분의 참석자가 시선을 주지 않는 벽면에 설치된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괜히 신경 쓰였다. 토크를 진행한 라캉 이론을 공부했다는 정신분석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야기가 마치 중간중간 끊겨 있는 철로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한 이야기들보다 그 이야기 사이의 분절감이 더 신경 쓰였다. 그녀가 말하는 방식은 마치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내 눈길을 끈, 시각의 사각지대에 설치된 화면 같았다. (사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라캉 계열 분석자들이 그랬다. 이건 아마도 라캉의 말하기 방식 자체를 닮은 것일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추후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SNS를 이용한 소통이 얼마나 무용하고 무기력한 것인지 설명했다. SNS를 통한 소통이 ‘말하나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결론은 결국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하려면 정신분석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깔때기처럼 좁혀졌다.
참지 못하고 Q&A 시간에 손을 들었다. 나는 이 토크에서 '말해지는 것처럼 보이나 말해지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뚝뚝 끊긴 분절감을 이어보고자 했다.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을 대부분의 참석자가 경험할 수 없는 “정신분석”의 공간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토크의 공간에서 이야기되기를 원했다.
잘 보이지 않게 설치된 프레젠테이션 화면, 그리고 이야기 사이의 미묘한 분절감을 최대한 친절한 언어로 설명했다. 그리고 SNS에 올려지는 글들은 발화자의 권력을 최대한 내려놓은, 가장 낮은 자세의 소통이 아닌지 의견을 말했다. 온라인에 올려지는 글들은 발화자가 통제력을 거의 가지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통된다. 누가 이를 읽을지, 어떻게 읽힐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감상자가 댓글을 남기지 않는 한 반응조차 알 수 없다. 이런 통제력을 내려놓은 소통은 무기력한 이들이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글을 발화하고 난 후, 그 불이 어디로 붙을지 모르더라도 “어떤 반응이든 이후 대응해 내겠다”는 객기일지 모를 그 용기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포함된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 행사를 접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하라! SNS로 홍보하여 사람을 모은 이 세미나에서, SNS를 통한 말하기의 무용성을 말하는 것은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지만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PPT는 자신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주최 측이 한 것이니 알 수 없다.”며, “SNS 소통에 대해서도 글쎄,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무기력한 소통 방식이라 생각한다. 다른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가” 여기서 대화는 끝났다.
아! 이 말과 말, 사이의 강!!! 또다시 끊긴 철로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결국,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이 세미나는 끝났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설명하고 이어내는 것이 아니라, 분절된 채 또 한 번 행동화된 언어로 느껴지는 경험은 마치 화장실에서 뒤를 닦지 않고 나온 것 같은 찜찜함을 준다. 내가 이 대화에 답답함을 느꼈던 이유는, 이 세미나에는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무의식의 발현이 산재해 있었으나 그 리더가 이를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그날 필요한 산지직송의 싱싱한 재료들을 몰라보고 냉동실에 얼려버리는 것과 같다. 세션에서 내담자가 던져 놓는 조각들을 분석가가 어떻게 바라보고 내담자가 이를 엮어내도록 돕는가가 정신분석의 본질일 터다. 이 세미나를 이끈 정신분석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몇몇 초기관계 소통과 관련한 정신분석이론을 소개하였으나, 막상 이 토크의 공간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려 했던' 주제를 엮어내는 분석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글이 길어졌다.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해 쓰고 싶은 말이 아직 산더미다. 읽는 이의 피로를 생각하여 결말로 어서 발길을 옮겨본다.
“무엇이 정신분석이 아닌가?”에 골몰하며 정신분석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을 찾아다닌, 지금까지 14여 년의 시간 동안 내가 깨달은 바는, 이는 이야기하는 내용보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내용이 정신분석이라는 강에 던져지면 그 던져진 조각 자체에 새겨진 의미보다, 이를 위로 띄워내고 여러 물살 속에서도 여러 다른 방파제들과 이어 함께 의미가 있는 역할을 하도록 엮어내는 데 정신분석이 있었다.
또 하나, 우리가 무언가 진실로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이 소통은 무의식이 먼저 준비해 그 대화의 공간에 그럴싸한 대화의 밥상을 차려놓는다. 어떤 것을 분석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할 때, 굳이 도서관에 꽂힌 책의 한 구절 안에, 자신이 말하려는 것을 명징하게 표현할 그 이론만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거들 뿐이다. 분석가가 그것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공간 안에서 참여자 들의 역동으로, 이미 그 주제에 대한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에 기민히 반응하면 참여자들이 준비 된 만큼 대화를 이끌어 갈수 있다. 같은 공간안에 흩뿌려진 관련 언어를, 참가자 모두 함께 엮어가도록 분석가는 그 과정을 조력하면 된다.
그간 다녔던 많은 세미나들에서 내가 “정신분석이 아니다”라고 느꼈던 것은 한정된 시간 안에 그 안에 준비된 대화의 밥상을 함께 음미하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나눠지고, 이어지고, 함께 탐구해 갈 그 과정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를 아는 내가 [나의 정신분석 이야기]를 이렇게 일방적인, 글을 올리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사실 직무유기다. 그래서 직무유기를 범하며 이를 먼저 알린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누가 이 글을 읽어볼까 생각해 봤다. 나는 이런 나의 글쓰기를 주변에 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몇몇에게만 알렸다. 대부분은 이 글이 당신의 알고리즘에 떴다면 당신은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거나, 상담을 하고 있으면서 정신분석적 접근에 관심 있는 마음공부 동료들이 이 글을 가장 많이 볼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이 정신분석적이지 않은 소통 방식으로 적어 내려진 내 글을 읽으며, “아 이건 정신분석이 아닌데” 하고 느낄 수 있다. 앞서 고백했듯, 일방적 글쓰기에서 당신의 그 감정은 정당하다. 그러나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내가 찾아간 그 많은 세미나 속에서 그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정신분석'을 더 찾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듯, 당신의 여정도 그 느낌에서 멈추지 않길 바란다는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여야 한다. 나의 어떠한 언어가 부족하게, 넘치게, 불편하게, 지나치게 친절하게 들렸는지, 어떤 이야기가 정신분석으로, 정신분석이 아닌 것으로 들렸는지 더 파고들어 보고 꼭 당신의 이야기로 이어가길 바란다.
정신분석의 다양한 이론을 공부하며, 종종 이것들은 용어만 다르게 쓴 같은 이야기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렇다고 각 이론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언어의 툴로 서로가 예민하게 다가가지 못한 부분을 더 명확하게 터치해 낸다. 나는 당신과 나의 여정도 그리 될 것이라 믿는다. 각자 어떤 것은 동의하고 어떤 것은 서로 밀어냈던 작은 요동들이 언젠가 더 큰 정신분석의 강에서 결국 한 줄기로 만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