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신분석의 열심

상영 전 주의사항 2. 누군가의 내담자인 당신에게

by Helen J

심리학을 전공하거나, 상담을 하고 있는 분들이 아닌데도 이 글을 당신의 알고리즘이 알아보았다면, 당신은 한두 번쯤은 정신분석, 상담 등을 검색한 이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번 글은 그중 정신분석을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 글을 읽기 전 드리는 당부입니다.





“다음에 오기 전까지 해야 할 일 있을까요?”

Intake session에서 한껏 마음을 쏟아낸 내담자가 상담실을 나서며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상담실 문을 나서면서 동시에 또 다른 상담 주제의 문을 여는, 굉장히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이러한 질문을 들으면, 50여 분간의 Intake session 내용을 녹여 어떤 신박한 조언을 할까 부담감을 느끼는 상담가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이 시간 이후 바로 다음 내담자가 예정되어 있다면, 10여 분 간의 짧은 휴식시간 중 화장실 갈 시간이라도 남기며 어떻게 대응할지 순간 곤란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사실은 질문 너머에 있다는 점이다. 정신분석이 늘 그렇듯이.



이 “다음 상담시간까지 어떠한 과제를 가질까”에 대한 질문의 답은, 분석가의 창의적인 해법 제안보다는 질문자 자신의 질문 속에 담긴 마음에 있다. 내담자는 어떤 지점에서 상담실을 나서는 것을 어려워하며 “과제”를 물었을까. 이 마음을 보아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응답일 것이다.



이 질문에 담긴 내담자의 마음에 따라 분석가는 서로 다른 반응을 하게 된다.


많은 경우 이 질문은 혼자 다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불안을 담고 있다. 처음 세션에서 내담자들은 늘 혼자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끙끙대던 것과 달리 50여분 동안 분석가와 함께 자신의 감정을 보듬고 다루는 경험을 한다. 이들이 다시 세션을 끝내고 상담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신과 자신만 함께 있는, 그 고독의 시간으로 다시 밀어내어지는 순간이다. 이것은 모처럼 포대기로 감싸 안아주던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내려오는 경험에 비유될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 '과제에 대한 질문'은 더 안아달라는, 그 내려진 아이의 울음과 같다. 이때 분석가가 주는 과제는 말하자면 엄마 젖가슴 대신 물려지는 쪽쪽이 같은 것이다. 분석가가 줄 과제를 수행하며 일상에 공간으로 분석가의 돌봄을 확장하고 싶은 것이다. 이 경우 아이를 내려놓은 엄마가 그렇듯, 오히려 담담하고 온화하게 다음 상담 시간을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 상담실을 나가는 것이 분석가라는 엄마 대상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하지 않음을 이야기하여 안심시킨다. 토닥거린다.


내담자마다 이 질문에 담긴 답은 결이 다른 마음을 담고 있었기에, 경우를 모두 나열하고 싶은 나의 지나친 완벽주의를 물러내고 두 가지만 뒤에서 더 나누고자 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가장 직접적 대응을 했던 경우는, 높은 자살충동으로 몇 가지 조심해야 할 행동이 감지될 때였다. 이때는 "본인은 다음 세션 전까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추가 대화를 이끌며 몇 가지 방지 책을 함께 논의하곤 한다. 이때 내담자가 말하는 “과제”는, 실제로는 ‘지내게 될 순간 동안 자신의 안전수칙이 intake session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불안’을 전달하는 것일 수 있다. 안전에 대한 확인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기에, 이 경우에는 세션 종료가 다소 지연되더라도 반드시 안전장치를 확인한다.


가장 조심스럽게 대응했던 경우는, 자기 통제에 어려움을 겪는 내담자가 이런 질문을 할 때였다.

타인 혹은 자신에 의해 정해진 약속 시간과 같은 ‘틀’을 지키기 어려워하는 내담자의 경우, 이런 질문에 순진하게 어떠한 제안을 하면 그 제안은 추후 분석에 있어 양날의 칼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규율에 대한 저항감을 가진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돌아보지 못한 채, 이들은 ‘혹여 더 좋은 규율이 존재한다면 나를 굴복시킬지도 몰라!’라는 기대로 첫 세션을 끝낸 분석가에게 더 좋은 과제를 요청한다. 이때 어떤 제안을 하게 되면, 이후 내담자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그 규율을 지켰는가, 지키지 못했는가”라는 틀 속에 가두게 된다. 때로는 그것이 완전한 해법이 아니라며 분석가를 비난하거나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석의 시간이 끝났음에도 이들이 끝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질문을 덧붙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미 이들은 세션의 시작과 끝 시간이라는, ‘내가 제안한 분석의 기본 틀’을 깨며, 더 좋은 틀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분석을 시작하면, 내담자는 자신의 삶이 갑자기 확장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온 무의식에 대한 인식은, 그 무의식의 공간 전체를 다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넓은 지를 새삼 알게 한다. 마치 1층이 전부인 줄 알았던 주택에서 비밀의 지하 공간을 발견한 듯, 그것은 신나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어떤 내담자들은 이 미지의 지하 공간을 ‘열심히’ 탐험하려는 모범생이 되려 하기도 한다. 이런 이들은 특히 분석의 초기에는, 많은 지식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여정을 준비한다. 이들의 온라인 알고리즘에는 정신분석 관련 행사, 심리학 강연, 새로 출간된 책의 북토크 소식이 뜨기 시작한다.
“세상에, 내가 왜 지금까지 이토록 무지했지?”
이런 자책과 함께, 이를 꼭 열심 모드로 알아내리라는 다짐 속에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팽개쳐 둔 나를 이제는 챙기겠다’는 일념 하에, 요가, 명상, 여행 등 웰니스라는 이름 하에 펼쳐지는 유사 심리학 행사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자신을 더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돌보려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혹여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이 정신분석을 받고 있는 중이거나, 받으려는 계획이 있는 시점이라면, ‘정신분석에 열심’인 내담자가 되고자 한다면, 잠시 멈추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길 권한다.



정신분석이 늘 그러하듯, 행위보다도 그 안에 담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먼저다.

다음 세션까지 과제를 받고자 했던 그 마음, 또 다른 학습의 공간에서는 너무도 환영받았을 이 질문이 정신분석의 장 안에서는 얼마나 중요한 이면을 지니는지 앞서 이야기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신이 이러한 정신분석 관련 글을 읽고자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이 글로부터 얻는 지식보다도 훨씬 더 유의미하다.

분석이나 상담을 받는 내담자가 정신분석학 관련 글을 읽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 안에는 저마다 색의 마음이 혼합된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 있다. 그 다채로운 마음의 이유들을 모두 언급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려되는, 정신분석에 글 읽기가 방해될 수 있는,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무언가든 성실하게 해내려는 삶의 태도를 지닌 내담자가 ‘좋은 내담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성실을 바탕으로 글을 읽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좋은 대상이 되고자 하는 열심’은 그 이면에 ‘그대로의 자신은 충분히 좋지 않다’는 느낌에 기반하기도 한다. 이때 정신분석학에 대한 글 읽기는 이 느낌을 채워주는 임시 보조제로 작용하여, 세션의 공간에서 주요 주제로 다뤄져야 할 ‘내가 충분히 좋지 않다는 느낌’이 분석의 공간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어떠한 경우, 이러한 글 읽기는 무의식이라는, 어둡고 파악되지 않는 미지의 자기 안에 대해 ‘무지하다’는 불안을 덜어내기 위해 많은 정신분석적 지식을 쌓으려는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무의식에 대해 모른다는 인식’은 정당하다. 아무리 오랜 정신분석을 통해 많은 부분을 의식화한다 해도, 그에게도 무의식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때는, 이 정신분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정인 ‘모른다는 불안’을 소거하는 것보다는 이 감정과 어떻게 친해질지, 어떻게 익숙해질지를 고민하는 것이 분석 과정에 더 유효한 준비일 수 있다.


또는, 상담가나 분석가에 대한 숨겨진 불신이나 경쟁심에 기반해, 간접적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이라는 ‘더 좋은 분석가’를 찾고자 하는 마음의 반영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이러한 글 읽기 속에 담긴 분석가를 향한 공격성을 자신이 충분히 인지하지 못할 경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어설프게 아는 몇몇 정신분석 이론으로 자신의 분석가를, 나아가 자신의 분석 과정을 공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 글로 전달할 정신분석학적 지식의 풍요성보다, 자신이 이 글 읽기로 얻고자 하는 그 이면의 동기에 따라 이 글은 꿀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혹여 지금 정신분석이나 상담을 받고 있다면 이러한 글 읽기에 대해 당신의 분석가 혹은 상담가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함께 논의해 보기를 권한다. 아, 글 하나 읽는데 무슨 이런 많은 절차가 필요한가! 복잡하게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정신분석을 알리고자 하는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들릴 수 있는 권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되는 볼멘소리에도 나는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며, 진심으로 이를 강권하고 싶다. 정신분석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알고 하는 글 읽기와 그저 열심인 글 읽기는, 같은 글에 같은 독자여도, 다른 차원 결과로 인도함을 알기 때문이다.



분석의 과정에서 자신을 이해하고자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그 마음은 정말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해할 그 귀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것은 들여다볼 만한 당신 마음 바닷속에서 일렁이는 어떤 것이, 이 글을 읽는 시도로 인해 낚시에서 찌가 움찔이는 순간과 같다. 찌의 움직임은 그 안의 물고기를 낚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 이 글 그 자체보다도, 그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 해아림 안에, 당신만의 정신분석이 있다.

그것에 '정신분석에서 행해져야 할 열심'이 있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4화정신분석이 아닌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