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이 떠난 강의실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N교수님의 팬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안티에 가까웠다.
N교수님은 나와 어쩌면 '코드'가 맞지 않는 분이었다.
교수님 수업에는 늘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긴장을 늦추는 그 어떤 순간, 당혹스러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토론식 수업에서 흐름을 놓치는 순간, 어떠한 맥락에서 누군가가 공격받는 그 장면을 놓치면 나도 타겟이 될 수 있다. 나를 방어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겁박'의 방식이 학습을 위한 좋은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습에 공간에 왜 이런 공포감 유도가 필요한가? 혹여나 이것이 어떤 교수님의 약함의 표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한껏 많은 가시로 유약한 자신의 몸을 두른 고슴도치의 그것처럼.
N교수님은 예민하고 똑똑한 분이었다.
말하는 이의 발화된 의식을 넘어, 무언가 death drive라고 불리는, 배움에 대해 주저하거나 정리되지 않은 어떤 역동이 느껴지면, 주저 없이 그것을 말했고, 종종 듣는 학생들은 예비 없이 들어온 칼날처럼 공격받은 느낌을 경험하곤 했다. 이처럼 무의식의 영역을 바로 들추는 방식이 정신분석적이지 않다고 항의하면, 교수님은 우리가 내담자가 아니라 정신분석가로 트레이닝 받고 있으니, 이러한 무의식의 갑작스러운 해석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나는 교수님의 공격성보다 교수님이 마치 우리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 같은, 감정적 연결이나 서로의 이해를 차단하는 듯한 그 태도에 자주 화가 났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life drive만 있겠는가. 누구나 삶과 죽음의 역동, 그 갈등 속에서 헤매며 살아간다. 그러나 N교수님에게 약간의 불안하거나 미완의 감각이 전달된 경우, 그것은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공개되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준비가 되었다면 그것이 왜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공간에 있었겠는가. 멍해져 있는 학생들에게 교수님이 보이는 그 자신만만한 태도, 마치 승리자처럼 보이는 그 조소는, 비정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맞서기에는, 너는 무의식의 층위라 그것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라는 평가가 자연스레 뒤따라왔다. 무의식을 가지고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의식수준에서의 대항으로 권위자인 교수님을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한 모든 부족함에도 저는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공간에 있습니다. 저는 나아가려고 이곳에 있습니다.' 하는, 그곳에 모인 학생들 모두가 가진 Life drive는 교수님껜 죽음의 역동에 가려 미미하게 보인듯 했다. 이 경우 종종 지적받은 학생은 수업 흐름을 놓치고 혼자 남겨졌다. 다른 학생들은 열심히 교수님이 지적한 부분을 따라가려 애썼지만, 자신의 무의식이 공개적으로 해석된 학생은 심리적 외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교수님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내 사례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견을 나누었더니 교수님은, 그 특기와도 같은 방식으로 어떠한 나의 지점을 지적했다. 나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교수님의 의중이 명확히 와닿지 않아 "Excuse me?"라고 다시 물었다.
그에 따라온 공격은 더 나아갔다. 교수님은 내가 "무기력한 아이" 같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마치 엄마의 젖가슴에서 바로 우유가 나오지 않자 빨기를 거부하는 아이처럼, 자신이 아무리 나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해도 내가 거부할 것이라고 했다.
"Then try again."
(그렇담, 다시 시도하세요.)
이날만큼은 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교수님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자신이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했다.
"세상 어떤 무기력한 아이가 엄마에게 다시 해보라고 요청하나요?
아이가 젖가슴을 빨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젖을 물리는 걸 포기하는 엄마라면,
혹시 제 무기력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무기력 아닌가요?
혹시,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에 저항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이때, 10여 년간의 유학생활 중 N교수님의 가장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았다.
교수님은 이후 다시 나에게 설명하려 했고, 나는 그 해석에 반박했다. 이 기억은 내 몸에 남아있다. 지금도 이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수업이 끝나고 몇몇 학생들이 다가와, "네가 이겼다"며 엄지척을 날렸다.
이때 내가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단순히 내가 교수님의 공격을 무력화했다는, 그런 싸움의 논리 이상의 것이었다. 난 그때 교수님과 처음으로 논리 싸움에서 벗어나 감정적으로 contact(접촉) 했다고 느꼈다. 늘 누군가의 어두운면만 중계하듯 해석하고 저 멀리 서 있던것 같던 교수님이, 이날은 교수님이 내 말에 동의하진 않아도 내가 그때 느낀 그 감정이 부분적으로나마 교수님께 공명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는 동안, 교수님께 진정한 애정을 받거나 이해받는 일에는 실패했다. 어쩌면 이날의 접촉이 교수님과 마지막 ‘만남(contact)이 되었다
요즘은 좀 절차가 바뀐 것 같지만, 내가 논문 작업에 들어가기 전, 박사 수료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보던 내담자 중 세 가지 주요 케이스를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하고, 관련 질의에 답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이것을 Case Presentation이라고 하는데, 이때 발표 내용이 좋았다는 평가를 다수의 교수님께 받았었다. 내 이름은 기억 못 하셔도, 그때 나눴던 사례를 기억하시고 나중에 더 이야기를 거신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후 fellow를 통해 모든 committee가 내 발표를 칭찬했으나, 한 교수님만 내 발표 내용에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며 테클을 걸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으!! 그럼 그렇지!!! 나는 그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교수님, 그렇게 계속하세요. 그래도 교수님보다 내가 더 오래 살 거니까, 내가 최종 위너!"
이렇게 나도 내 맘속으로 교수님께 펀치를 날리며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런데 이번 주 월요일,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메일을 받았다.
몇 주 전, 교수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니, 교수님처럼 강한 분이라면 금방 털고 일어나실 거야."
라고 했던 내 생각이 무색하게.
시원하게 교수님을 설득해 보지도, 교수님께 이해받아 보지도 못했는데…
교수님을 미워했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의 빈자리에 내 마음에 며칠째 폭풍이 쳤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자 고행 같은 학문의 길을 걸으며,
뭔가 이후에 큰 무언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믿지만,
결국 우리는 그러면서도 한 걸음씩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일까,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 aim of all life is death.”
(모든 생의 목표는 죽음이다.)
삶과 죽음 역동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정신분석은 충만한 삶의 역동을 지원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모든 생의 마지막 관문은, 죽음이다.
교수님보다 젊다는 걸 무기삼아, 내가 더 오래살거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나지만
왠지 교수님이 떠난 자리에서 다시 두리번거리게 된다.
교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나는 교수님을 사랑했는가,
나는 어떻게 죽음을 향해 가고있는가.
언젠가 나도 교수님처럼 떠나는 날이 될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가끔 교문앞 계단에 앉아계시던, 왠지 작아보이던 교수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