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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다는 것

잘 쓴 글과 문제에 닿는 글 사이

by Helen J

“You are a very good writer but I'm not sure you are in touch with the problem yet.”

(잘 쓴 글이지만 아직 네가 그 문제 자체에는 완전히 닿지 못한 것 같다.)


올해 초 교수님과 글을 주고받다가 짧지만 강렬한 위와 같은 문장을 답변으로 받고, 나는 순간 멍해졌다.

돌아보면 꽤 불편한 주제에 대해 나름 분석적으로 정성껏 서술해 보내드린 글이었는데. 나도 몰래 내심 칭찬을 기대했던 것일까, 혹은 이 불편한 주제의 글에 정성스레 답해드리고 어서 다른 주제로 도망가고 싶었던 걸까.

이런 심리적 타격을 숨기고 '다음 교수님과 미팅 때 더 깊은 이야기를 하기 바란다'며 여유 있는 척 답변을 보냈지만, 며칠간 저 문장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핵심 문제에 다가가지 못했다면 분명 그건 내가 잘 쓰지 못한 탓일 거다. 내가 접근하지 못한 the problem은 뭘까, 무엇이 나를 가리고 있는 걸까.



“말이 시적이네요.”

얼마 전 처음 보는 분과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small talk을 하다가 이 얘기를 듣고, 유학생활이 생각나 멈칫했다.

수업이 끝나면 Log라고 불리는 작은 인덱스 카드에 수업에서 느꼈던 감상이나 생각을 제출하는 건 모든 수업의 필수 과제였다. 이것은 교수와 나 사이의 글을 통한 소통이라, 토론 수업에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개인적 감상을 나누거나, 그 수업 하나를 작은 집단 역동으로 보고 그에 대한 분석이나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조용하고 작고 어린 동양 여자아이'로 보여졌던 내가 보통 수업에서 교수님들의 주목을 받은 건 Log 덕분이었다. 보통 교수님들은 내 Log를 좋아하셨다. Log는 솔직한 감상과 생각 표현이라 잘 쓴 것도, 못 쓴 것도 없다지만, 가끔 교수님들은 이례적으로 내 Log 내용을 언급하시기도 했고, 몇편의 내 글을 보신 후엔 보통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한결 부드러워지셨다.


“You are so poetic.”

(넌 꽤 시적이야)

이때 내가 많이 들었던 평은 내 글이 시적이라는 것이다. 아, 아무래도 내가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여 생각하다 보니 어떤 표현들은 영어적이지 않아 이렇게 느껴졌나 보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 새롭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로 소통할 기회가 있을 때, 한글로 쓴 글에도 종종 이런 평을 받다니. 내 언어가 입고 있는 옷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혼동스러워졌다.





“This paragraph doesn’t need to be so poetic.”

(이 단락은 그렇게 시적으로 쓸 필요는 없다.)

요즘 논문을 쓰며 지도교수님께 가장 많이 지적받는 부분은 글이 시적이라는 것이다. 연구글은 단백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보통 내담자의 역동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림 그리듯 글을 쓰는 내 특징은 툭 하고 튀어나온다. 나는 나 대로 답답한 것이, 난 시적으로 써야지-하고 쓴 글이 아니란 거다. 나 나름엔 정확하고 간결히 핵심만 쓰려고 한 글이다. 뭔가 스탭이 엉킨 느낌이다.


이러한 내 글쓰기에 대한 평가도 갈려서 내 논문 초반 챕터를 몇몇 교수님들께 보여드렸더니, 이례적으로 Research Committee에서 내 논문 초고가 공개적으로 칭찬받았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칼이라 내 글이 더 연구적으로 다듬어져야 한다고 조언하시는 분들도 많다. 이런 조언에 따라 요즘 나는 써놓은 글을 연구적 언어로 다듬고 있다. 이건 내게 살아있던 유기적 형태의 감정을 평면적으로 깎아내리는 듯한, 마치 곡선의 내 몸을 원통형으로 썰어내는 것 같은 아픔을 준다.



여러 곳에 강의를 가며 느꼈던 잔상, 외할아버지의 장례, 노교수님들과 이런저런 사담 등 요즘은 쓸 거리가 너무나도 많은 날들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 내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조금은 그 행동을 묵혀두게 되었다.


잘 쓰는 건 뭘까?

시적이라고 타칭되는 나의 글은 친절한 묘사일까, 혹은 무언가 핵심을 피해 수사적인 포장일 뿐일까?

정리되지 않은 질문을 바라보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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