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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처럼 밀려오는 시간

잔잔하고 절절한 묵호의 물결

by Helen J

난 보통 물가보다는 산을 좋아한다.

계절마다 부지런히 모양을 달리하는 나무와 그 속을 걸을 때 들리는 철마다 다른 소리.

산에 가면 왠지 몸에 닿는 햇살의 색도 계절마다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열심히 자신의 생명의 힘을 한껏 뿜으며 다른 작은 생명을 품어내는

큰 산의 기운에 나는 왠지 겸손해져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잔잔한 물보다는 나무가, 푸른 바다보단 산이 생명의 그 증거 같았다.


그런데 왠지 지난겨울부터인가, 간절히 바다가 보고 싶었다.

빛이 해수면에 먼저 인사하며 반짝대는, 찰랑찰랑 넘칠 것 같은 바다.

리듬에 맞춰 치는 파도 소리와 방파제에 부딪쳐 쏴아- 부서져버리는 물결의 폭죽

어김없는 그 흐름의 증거가 지금의 나의 갈증을 풀어줄 더 생생한 한 모금처럼 간절했다.


지난 계절부터 뭔가 정체된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압도했다.

답답하고 어이없는 뉴스들, 시위현장에서 맘껏 소리를 지르고 행진해도 해소되지 않는 고구마 100개 먹은 느낌. 이 시국에 여행을 계획할 흥도 나지 않아 나는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떠나고 싶은 마음도 흘려보내지 않은 채 내 맘에 고여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파면 선고가 나고 드디어 바다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쓰읍—쏴아— 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소리.

바람에 곁들어오는 짭조름한 냄새, 색색깔의 방파제. 아, 이제 나는 깊이 참았던 숨을 쉬는 것 같다.


그간 너무 지쳐서 돌아다닐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온 나는 무심결에 작가님과 동네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듣는 일종의 투어프로그램을 예약했다. 이곳에서 살아온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그저 한산한 바닷가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 치열하게 살아온 주민들의 삶이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듯, 어쩌면 죽어있는 듯 보일 수 있는 이 동네에 얼마나 많은 생의 투쟁이 있었는지 공간을 돌아보며 나는 숙연해졌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위해 개발된 묵호항. 빼앗김의 증거로 성장한 역설적인 도시, 묵호.

이후 많은 해외물자들이 들어오며 부흥기도 있었지만 부근 더 큰 항구가 개발되며 헤어진 옛 연인처럼 잊힌 곳.

뱃일 나간 가족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맘을 입어 올리기도 두려워 “잘 가세요”라고 인사했다는 그 절절한 마음들이 마음을 툭툭 치는 파도처럼 나를 깨웠다.


아, 이제는 이곳을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바닷가 동네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 공간에 담긴 2천 명 남짓한 주민들의 삶의 과정들이 마음에서 뱃소리처럼 웅웅댔다.

한때 많은 어류 수확으로 마을을 일으키기도, 때론 모든 것을 뒤 삼킨 태풍으로 많은 이의 생을 삼켜버리기도 한 바다 옆에서 든든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이 철마다 부지런한 나무보다 더 굳건한 삶의 증거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나 따뜻해졌던 건, 여행 중 만난 모든 마을 분들의 사람 냄새나는 호의들 덕분이다.

소장한 LP를 전시하고 계신 사장님이 나를 보고 직접 골라주신 음악과 건네신 보이차의 온기.

한참 동안 책을 추천해 주고 다음에 가볼 곳을 알려주시던 책방 사장님의 열심,

이른 아침 들른 식당에서 “맛있게 만들어 줄게요”라며 반겨주시던 주인장의 따스함.

이런 공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추천해 준 작가님 픽 로컬 추천 공간들,

그 모든 호의와 정이 마음에 넘실대도록 충만하게 채워졌다.


‘검은 호수’라는 이름의 묵호.

그곳에서 어쩌면 예상치 못한 해일 같은, 그간 언젠가는 물러가고 또 밀려온 주민들의 삶이라는 파도를 만나,

거대한 생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맞고 왔다.

조용하지만 힘찬, 바다의 생명력을 만난 여행이었다.




*111호 프로젝트: https://m.blog.naver.com/111ho_project

(묵호필름투어 프로그램을 모두에게 강추합니다)

*책방균형: www.instagram.com/balance__books

*광식이네 칼국수: 강원 동해시 발한복개로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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