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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제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는

by Helen J

나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극복하고 싶은 건,
현실성이 부족한, 공상형 인간이라는 점이다.


나를 겉으로 보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일처리가 빠르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나는 느린 사람이다.


이 느림의 밑바닥에는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그때에 머물러 그 당시의 좋음을 더 오래 느끼려는

나의 성정이 깔려 있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모든 현실은 순간의 현실임을'

이것을 마음속에서 굳이 물러내고 내린 내 선택들이 종종 나를 그곳에 닻을 내리게 했다.


이런 일에는 수십가지 예가 있다.


유학 시절, 부모와 떨어져 보호처분이 내려진 아이들이 지내는 쉘터에서

그룹 상담과 생활지도를 도우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 슈퍼바이저가 정규직 제안을 해왔다.
기뻐하며 내게 오퍼를 건넨 그에게
나는 망설임 없이 “괜찮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그 기회를 기반으로 비자도 받고 경력으로 졸업쯤엔 다른 일자리로 이동할수도 있었을텐데

그땐 ‘그냥 이렇게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 일하는 게 좋아서’라는 생각뿐이었다.


또 그때쯤에 내 세상에 전부였던 남자친구가
기념일에 반지를 건넸을 때도 나는 망설였다.
“나는 우리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모두가 나에게

코로나 시기에 귀국했으니 이제 논문에 박차를 가하겠구나,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오히려 평생 학생으로 살수는 없을까 궁리했다.
“지도교수님과 매주 미팅하고, 슈퍼바이저 교수님께 칭찬받는 지금이 좋은데” 라면서.

그렇게 늘 현재에 머물렀다.

조금은 시간이, 내 세상이
나를 천천히 기다려줄 것이라 믿으면서.


하지만 요즘 들어,
결국 시간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임을 실감한다.

노교수님들의 잦은 병환 소식,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한 안타까움,
이 모든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문제다.


“그건 시간 문제지.”
“천천히 하면 되지.”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오겠지.”

이제 그 문제들이 더이상은 미룰수 없는 당면 과제가 되어 내 앞에 떡하니 서있다.

지금 하거나, 더이상은 못하는 과제가 되어버렸다.


늘 그렇게,
내 시간의 바다엔 퍼도 퍼도 가득 찬 푸른 물결이 일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물의 양보다 그 흘러가는 모든 것이 아쉽다.


지난 주말, 보스턴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지도교수님의 병환 소식을 전하며,
“너랑 얘기하면 그 교수님과 얘기하는 것 같아.”라며, 우리는 같이 울먹였다.


난 그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 있던 이곳을 박차고 나아가
교수님 앞에 더 듬직한 모습으로 서고 싶다.
더 많이 배우고,
어서 더 그분처럼 되고 싶다.

이제는 더 피할수 없는

내게는 시간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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