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그림이다. 이보다 더 먼저 끄적거린 그림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나의 그림은 이 그림이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모두 일본 도쿄에 가서 살게 되었고 부모님은 나를 일본 유치원에 다니도록 해주셨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유치원이었지만, 다섯 살짜리, 일본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혼자 걸어갈 수는 있는 거리는 아니어서 매일 엄마가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등원시켜 주곤 하셨다. 엄마 나이 마흔한 살일 때였으니 역시나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인했던 것.
좋은 선생님들의 따뜻한 돌봄을 받으며 유치원에 다닌 지 2년이 지나고 소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시면서 중요한 곳에 활용할 거니까 평소보다 더 잘 그려보라고 하셨다.(이 선생님은 김치를 너무 좋아하셔서 가끔 우리 집에 오셔서 엄마에게 김치를 얻어가곤 하셨다) 그때 내가 그린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중요한 용도가 개인별 유치원 졸업앨범의 표지였다는 건 졸업 직전 내 그림으로 제작된 앨범을 손에 받아 들었을 때야 알게 되었다. 앨범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었다면 나의 가장 오래된 그림은 대략 10년 뒤에 그린 그림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 감사하고 귀한 기념품이다.
앨범 표지를 넘기면 붓글씨체로 글귀를 써넣은 종이가 있었는데 일본어로 쓰여있던 것을 번역하면 이런 말이다.
누구에게나 머리가 하나씩 있다.
그러니 생각을 하라.
(ひとつずつ頭がある。考えろ。)
오래 간직하게 될 유치원 졸업 앨범의 맨 앞장을 장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문구가 또 있을까? 말 자체는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없지만 그 뜻은 깊다. 어쩌면 원장님의 좌우명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유치원 원장님은 '전원일기'의 일용이와 똑같이 생기셔서 가끔 그 배우님이 TV에 나올 때마다 혼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