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한 냄새가 벌써 코끝을 자극한다. 매울 줄 알면서도 날름 입 안에 집어넣는 빨간 맛. 불같은 맛에 혀가 마비되어 미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얼음같이 찬물을 벌컥벌컥 마셔보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분 함량이 높은 음료를 얼얼한 입 안에 가득 물고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서서히 나의 미각세포가 살아난다. ‘이게 이렇게 달았다고?’ 평소엔 마시지도 않던 복숭아향 음료가 천국의 맛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콧등과 겨드랑이에 맺혔던 땀이 식고 곧 체온도, 심장도, 머리도 차분해진다. 매운맛은 그런 매력이 있다. 삶에도 가끔 빨간 맛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확신이 서지 않은 채로 꾸역꾸역 머릿속에 욱여넣은 생각이 눈앞을 흐릴 때, 무엇이 더 중요한지 분간조차 못 하고 들이대었다가 순간 내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매운맛에 정신이 바짝 든다. 그러고 나면 하찮게 여기던 복숭아향 음료의 단맛을 재발견하듯이 흔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새롭게 확인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더 큰 행복을 좇겠다고 이미 누리던 감사한 삶을 포기하려던 그때, 나의 배우자가 쓰러졌다. 두 딸아이가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나와 배우자는 그동안 한국에서 일궈온 일상을 포기하자고 서로를 설득했다. 늘 풍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 두 사람 모두 밥벌이를 하면서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민이라는 목표를 갖게 되면서 삶이 달라졌다. 비록 남편의 나라로 이주하는 거였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대학 졸업 후 짧은 첫 직장생활의 경험뿐 이후 한국에 보낸 20년이 그에게 훨씬 더 농도 깊은 시간이었다. 생판 남의 나라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나만큼이나 그도 역시 불안해하고 긴장했다. 어쩌면 우리의 계획이 그에게 더 혹독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공책의 새 페이지를 열어 다른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내게는 그것이 완전히 다른 출발이었다면, 길고 고된 적응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이곳에서 가족과 정착하려던 그에게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을 것이다.
떠나기도 전에 살림을 조였다. 미래에 누리게 될 행복을 위해 지금의 우리를 조금 양보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곳은 여성과 이민자에게 더 호의적인 나라이므로 분명 배우자보다 나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재교육받고 구직하는 동안 안정적인 수익을 가진 배우자가 한국에 남아야 했다. 제 식구는 자기가 떠나온 나라로 보내고 이국땅에 남아야 하는 역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에 대해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가 주춤하자 영영 떠나지 못할 것 같은 엉뚱한 불안에 휩싸였다. 정작 우리가 함께 바라던 행복은 잊은 채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만 선명해졌다. 최선을 다해 배우자를 설득했다. 하물며 나무 하나를 옮겨 심어도 1~2년은 뿌리를 내리고 적응하느라 부대끼고 성장을 멈춘다는데, 우리도 조금만 부대껴보자고.
포항에는 드문 함박눈이 내리던 날, 나는 배우자를 두고 아이들과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시차 적응이 끝나자마자 학교에 갔다. 빠른 졸업과 취업을 꾀하며 꾹꾹 눌러 채운 엄마의 시간표 때문에 어린 두 딸은 등교 전, 후로 돌봄 교실에 맡겨졌고 방학이 되어도 늦잠 한번 잘 수 없었다. 주중엔 학교에, 주말엔 일을 했던 엄마의 부재로 아이들은 늘 캠프에 가해야 했다. 나는 나대로 정신없이 달렸다. 비싼 학비가 부담스러워 다음 학기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이론과 실기 수업에 온 에너지를 쏟았고 늦은 저녁에 돌아와 아이들을 먹이고 씻겼다. 늦은 밤엔 밀린 집안일과 다음날 먹일 음식을 준비했고 새벽까지 과제를 하다 잠들었다. 생활비가 늘 빠듯했지만 불평할 수 없었다. 최소한의 금액만 남기고 모두 내게 보내주는 배우자가 홀로 견디는 외로움 속에서 너무 곤궁하게 지내는 걸 원치 않았다. 모두가 위태롭게 버틴 끝에 다시 겨울이 왔다.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면서 벌이가 훨씬 나아졌지만, 남들 놀 때가 내가 가장 바쁠 때였으므로 아이들과 평범한 일상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나는 고된 일과에 지치고, 배우자는 외로움에 지쳤으며 어린 딸들은 부모의 부재에 지쳐갔다.
배우자가 쓰러지던 날, 나는 늘 같은 아침을 맞았다. 부족한 수면에 피로한 몸을 침대 밖으로 겨우 밀어내는데 바닥을 디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장시간 서서 일하던 내가 근래 자주 겪는 증상이었다. 쿵 하고 주저앉는 소리에 아이가 방으로 달려왔다. 걱정스러운 눈을 한 아이에게 내가 선수를 쳤다. “일주일만 있으면 아빠가 오시네!” 배우자는 곧 사직할 계획이었고 마지막 휴가 찬스를 이용해 한 달 즘 다니러 올 것이다. 이주에 대한 그의 불안이 여전히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했고 나 또한 그에게 고단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매번 씩씩하게 통화했다. 그즈음 배우자는 운동에 몰두했다. 운동을 핑계로 혼자만 있지 말라고 권했는데 아이스하키와 수영을 하면서 활기를 되찾은 그의 모습이 반가웠다. 그날 남편은 하키팀의 연습경기가 있다고 미리 연락했더랬다. 그래서 저녁 통화는 건너뛴다고 했는데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놀라지 말라고, 자기는 정말 괜찮다고 말하는 배우자의 목소리가 너무 멀쩡해서 장난인 줄만 알았다. 경기 중에 몸에 무리가 와서 응급실에 왔는데 다행히 같이 운동하는 멤버 한 명이 한국말이 서툰 그를 위해 함께 와주었다고 했다. 배우자의 병력과 평소에 복용하는 약들을 일러주고 비용은 상관없으니 무조건 심장 쪽 검사를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엉뚱한 허리 검사만 하던 중에 입, 코할 것 없이 온몸의 구멍에서 출혈이 시작되어 뒤늦게 대동맥 파열을 확인했다는 연락이 왔다. 포항에서도 꽤 큰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했다. 이동 중 사망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그를 울산의 또 다른 종합병원으로 옮겼고 내 부탁에 울산 병원까지 동행한 친구에게 나는 모든 결정의 권한을 위임했다. 응급수술에 들어가기 직전 통화를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다 잘될 거야. 아이들 데리고 지금 한국 갈 테니까 한숨 푹 자고 깨서 우리 다시 만나자’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 전화를 끝으로 남편은 홀로 10시간이 넘는 대수술 후 내부 출혈이 멈추지 않아 개복 수술을 또 한 차례 받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에 어떻게 짐을 싸고 공항으로 달려가 한국행 비행기를 잡아탔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풍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가족이 도착하기 전에 장례를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부고 아닌 부고를 듣고 병원에 와준 수십 명의 직장 동료들, 우리 부부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중환자실 앞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고마움과 안도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두 차례의 수술 후 단 한 번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배우자를 그만 깨워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가장 많은 기계와 주사액을 달고 있던 그는 '우리가 왔으니 이제 깨어나라’는 말에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그를 두고 의료진은 장시간 혈액이 순환되지 않은 다리를 절단해야 하고 손상된 간 때문에 평생 투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온갖 진통제와 수면제로 환각에 시달리는 데다 의료진과 제대로 소통할 수없던 그를 위해 중환자실에 내가 상시 머물 수 있도록 예외적인 배려를 해주었다. 곁에 있을 수 있어 안심이었지만 때론 고열과 출혈로 그가 의식을 잃거나 심장이 멈추는 위급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꺼지지 않는 불빛과 의료 장비의 기괴한 기계음이 들리는 그곳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맞이하는 다른 환자와 사망선고를 듣고 신음하던 가족을 마주해야 했다. 수없이 목격해도 죽음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무작정 믿기로 했다. 가진 종교가 없었지만 그를 데려가지 말라고 모든 것에 기도했다. 하느님, 부처님, 성모마리아, 알라신, 오래전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급기하 모든 사물에 대고 기도를 읊조렸다. 며칠 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출혈이 멈추고 좀처럼 잡히지 않던 열이 떨어졌다. 차갑던 두 다리에 온기가 돌고 노랗다 못해 주황빛이 돌던 피부색이 서서히 돌아왔다. 순번을 정해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고 면회 시간마다 곁을 지켜준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배우자는 매일 조금씩 죽음과 멀어졌다.
그는 기적처럼 호전되어 2주 만에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드디어 일반식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지만,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해 며칠이 난감했다.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던 그가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나 친구가 직접 만들어준 서양 레시피의 회복식도 쉬이 넘기질 못해 당혹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그가 어려서 좋아했다던 음식 하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주말 아침이면 막 부친 계란프라이를 얹어 만들어주던 따뜻한 잉글리시 머핀. 한파로 한창 추웠던 그날, 나는 왕복 40분을 걸어 에그맥머핀을 사 왔다. 돌아오는 동안 식지 않게 내내 패딩 안에 품고서 기쁜 마음으로 걸었다. 배우자는 여전히 따듯한, 이천 원짜리 머핀 하나를 받아 들고는 이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이게 이렇게 맛있었다고?”
내가 응급실에서 걸려 온 남편의 전화를 받던 그날, 먼 이국땅에서 우리가 꿈꿨던 삶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배우자가 완전히 회복하고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를 다시 타는데 까지 꼬박 2년이 더 걸렸다. 아이들은 다니던 학교에서 친구들과 뒤늦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직장 사물함에서 두고 온 요리 툴을 챙겨 정식 사직 절차를 밟았다. 가구와 차를 팔고 마지막으로 집을 팔았다. 정작 그곳에서 지낼 때는 시간이 없어 겨우 치우고 대충 꾸미며 살았는데 더 좋은 주인 만나라고 정성을 다해 한참을 쓸고 닦았다.
이제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다. 이곳이 싫어 떠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여전히 이곳에서만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도 아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내 가족도 행복할 수 있는 진짜 홈 Home이라 믿는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평범한 일상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살아갈 작정이다. 잘살려고 너무 애쓰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가혹하리만치 매웠던 내 인생의 빨간 맛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않고 잘 사는 방법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