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가 흐려지고 이내 정신도 아득해진다.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져서 털썩 주저앉거나 어디든 기대어 눕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더 이상 내 몸의 이상 신호를 무시할 수 없어 병원에 갔다. 본래부터 혈압이 낮은 편이어서 건강을 예민하게 챙겨 왔다고 자신했는데 갑자기 생겨난 증상에 덜컥 겁이 났다. 의사의 진단은 간단했다- ‘저나트륨혈증’. 원인은 소금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몸속 균형이 깨져버렸다고 했다. 소금, 즉 나트륨은 다양한 신체 생리 기능 유지에 관여하는데 세포가 정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혈중 나트륨 농도를 0.9% 정도로 적절히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몸속 세포들이 정상적으로 신호를 주고, 받을 수 있고 영양소나 산소가 온몸으로 운반될 수 있는 것인데, 그 무렵 나는 소금 섭취량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배우자는 유전적 요인으로 기인한 고혈압을 더 이상 식단관리와 운동처방으로 조절할 수 없었고 곧 의사는 약물 복용을 권고했다. 고혈압과 동반된 합병증을 앓다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때문인지 배우자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함을 내비쳤다. 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좀 더 철저한 식단 관리로 극복해 보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시작된 저염식 실천이 나의 몸을 상하게 하는 줄도 몰랐다.
체내 소금의 비율 0.9%는 고정 치이기 때문에 그 비율에 비례하게 늘 수분량이 조절돼야만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배우자의 혈압관리에 도움이 되었던 저염식이 나에게 되레 독이 되었던 이유는 평소에도 짠 음식을 습관적으로 피해왔던 터라(나 역시 오랜 고혈압 병력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고 나도 모르게 저염식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때 깨달았다.) 나의 바뀐 식단은 무염식에 가까웠고 저혈압 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다 보니 평균인보다 땀 배출량과 물 섭취량은 월등히 높아 내 몸속 균형은 더 빨리 무너져버렸다. 혈액 1리터당 5 밀리몰(*mmol: 몰농도의 1,000분의 1)이란 작은 차이는 심한 경우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뉴질랜드로 이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 있다. 그곳에서 다과로 내놓은 오렌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냥 먹기도 아까운 오렌지 위에 뿌려진 굵은소금. 당황해하는 나의 일행에게 현지에선 다들 그렇게 먹는다며 우선 먹어보라고 재촉했다. 상상만 해도 소금의 짠맛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이전에 먹어본 여느 오렌지보다도 더 달았다. 뇌에서 먼저 인식하는 소금의 짠맛에 이어 느껴지는 단맛이 극대화되는 원리였다. 소금라테, 소금 한 꼬집을 넣는 태국 수박주스 땡모반이나 소금 캐러멜과 초콜릿처럼 요즘은 달콤한 과일이나 음식에 일부러 소금을 첨가해 먹는 것이 생소한 일이 아닌 게 되었다. 그야말로 흔하디 흔한 소금 한 꼬집으로 전혀 다른 단맛을 극대화하는 획기적인 상승효과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장황하게 소금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유는 몇 해 전 나트륨 불균형이 찾아와 내 건강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것처럼, 요즘 나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 삶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한동안 미량의 소금처럼 내 삶의 기쁨을 극대화해 줄 만한 것들을 잊고 살았다. 어린 두 딸을 키워야 했고 틈틈이 가사도 하며 경제활동도 해야 해서 늘 하고 싶은 일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당연한 줄만 알고 살았는데, 두 아이가 제법 자라 육아와 집안일이 줄면서 취미 생활을 하나둘 시작하고 나니 그간 이런 재미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어 진다. 격주로 진행되는 책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주 5회 아침 운동과 2회 축구, 그리고 매주 이어지는 글모임까지 더해졌다. 일하는 시간이 조금 줄긴 했지만 1일 평균 5시간 이상 수업을 하고 내 몫이라 여겨온 그 밖의 가사도 그대로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가르치는 일이나 가사, 육아와 같이 남을 위해 하는 노동이 더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로 그런 일들을 통해 나의 쓸모를 확인하려 애쓴다. 내가 지금 누리는 나를 위한 시간이 달콤하다가도 문득 ‘이 시간을 이렇게 써도 되나?’, ‘여가 활동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해 온 탓에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임에도 그 안에서 강박적으로 효용성을 따져본다. 나를 필요로 하거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옳은 게 아닌지 스스로 묻기를 반복한다. 나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생각을 나눌 때 큰 행복감을 느낀다. 또한 스스로 건강과 재미를 위해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과정에서 활력을 얻는다. 하지만 모임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을 끝내지 못하거나 글을 제때 완성하지 못할 때, 혹은 운동을 하면서 적절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한껏 의기소침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가끔은 좋아서 하는 일인데도 그 안에서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비로소 정당하게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래전, 오렌지 위에 뿌려져 있던 굵은소금은 요즘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것을 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지 잊어갈 무렵 오독! 씹히는 굵은소금 결정처럼 그 끝에는 삶에 대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극대화해 주는 힘이 있다. 건강한 삶을 위해 깨어져서는 안 되는 체내 소금 비율의 고정값이 있듯이 행복한 삶을 위해 나만의 Happy Hour 비율의 고정값이 있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앞으로는 그 행복 농도를 포기하지 말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