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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08. 2024

인생의 신맛

<노란 슬픔>

  해마다 연말이면 하는 의식이 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묵은 짐을 비워내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새해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을 얼마쯤 마련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늘 그래왔듯 서재로 쓰는 방을 가장 먼저 청소한다. 서랍을 차례로 열어보다 맨 아래 칸에 놓인 상자 하나를 끄집어냈다. 이 집에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같은 서랍 안에 들어있던 그 상자 안에는 편지가 들어있다. 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 그것들은 하나같이 먼 나라 뉴질랜드의 국제우편 소인이 찍혀있다. 날짜별로 정리되어 낡은 고무줄에 묶여있던 편지들은 아버지 집에서 발견되었다. 화장한 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오던 날 유품을 정리하러 들렀다가 내 손으로 찾아서 가지고 왔다.


  17년 전 5월,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연달아있던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서는데 맞은편에 앉은 선생님이 내 전화기가 쉬지 않고 울어댔다고, 급한 모양 일인 듯하니 확인해 보라며 휴대전화를 건넸다. 성인이 된 이후 안부조차 물은 적 없는 사촌 언니의 이름이 부재중 통화에 연속으로 찍혀있는 것을 보고 무언가 큰일이 난 것이라고 확신했다. 전화기 너머로 사촌 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아빠가 돌아가셨어.”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하지만 그 슬픔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장례식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유일한 직계가족이었던 내가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약품 냄새가 가득한 방에 들어가 온기를 잃고 누워있는 아버지를 마주했다. 장례식장 직원은 아버지의 몸을 연신 주무르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발견이 늦었던 탓에 일부 관절이 굳어버렸고, 최대한 마사지해서 펴 드려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아보았다. 예상만큼 차갑지 않은 손을 붙들고는 어쩌면 지금이라도 심장마사지를 하고 입김을 불어넣으면 깨어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염습을 준비하던 남자는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최소 5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 장례식의 상주가 될 수 없었다. 큰아버지의 두 아들이 번갈아 가며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상주 역할을 대신했다. 큰집 식구들과 아버지의 지인들이 빈소를 함께 지켜주었지만, 부모님의 이혼 후 십 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린 탓에 모두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어린 딸에게 이혼 후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아버지란 사람의 죽음을 책임 지울 수 없었는지 큰집 식구들은 장례에 대해 모든 결정을 대신해 주었다. 아버지에게 어떤 수의를 입히고, 무슨 관에 누일지부터 어떤 종교의 방식을 따라 장례를 진행하고, 결국 매장을 할지 화장할 지조차도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버지가 당신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애도해 주길 원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가족에게 무심했고, 성질이 괴팍했으며 무능했다. 한 직장에 삼 개월 이상 붙어있지 못했던 탓에 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져야 했지만 살갑기는커녕 늘 외도를 꿈꿨고 성질이 급해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었다. 미워하려고 작정하면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삶이 애처롭게 보였다. 부유한 집안에 7남 2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머리 좋고 출세한 형제들 사이에서 늘 주눅이 들어 살아왔다. 성인이 되고 가정까지 꾸린 아버지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남과 비교하고 무시하던 나의 할머니 품에서 그는 결코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느꼈을 어떤 분노와 열등감을 가지고 그의 남편답지 못함과 아버지답지 못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아버지 자신도 방법을 찾지 못해 그 불행에 갇혀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 마냥 미워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 후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곧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었고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9,946km라는 엄청난 물리적인 거리가 생겨버렸다. 어느 날부턴가 아버지는 내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필체를 보았고, 그도 상처받은 마음과 그리움을 표현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번 정성스럽게 답장을 썼다.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네 잎 클로버나 예쁘게 마른 낙엽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간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아버지는 더 늙고 쇠약해졌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 우리는 가끔 만나 식사를 같이하곤 했는데 편지로도 메꿀 수 없었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시간의 공백은 어쩔 수 없이 어색하므로 채워졌다. 함께 만나는 것이 조금 불편해졌고 가끔은 핑계를 만들어 약속을 미루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병들어 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앓아온 고혈압은 더 이상 약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의 심장과 혈관은 서서히 그 기능을 잃어갔다. 몇 해 전 뇌졸중으로 얻은 경미한 언어장애와 함께 찾아온 우울증은 아버지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지만 나는 온통 내 삶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늦은 밤, 자려고 누웠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가 아버지인 것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는데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와 건강 잘 챙기라는 당부에 이어 별안간 내게 사과했다. 지금껏 스스로 언급한 적 없던 지난날의 폭력을 모두 인정하며 아버지는 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급하게 다른 이야기를 하다 끊어버렸다. 그게 마지막 통화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해줬을 텐데. ‘다 용서했다고, 과거의 일은 그만 모두 잊자고….’ 그랬다면 아버지가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이 내 탓만 같아서 오래도록 마음이 무거웠고 누구에게도 그와의 마지막 통화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가 쓰여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본다. 아버지는 이 편지들을 몇 번이나 읽었을까? 여러 차례 열고 접은 흔적으로 구깃구깃해진 편지지가 마치 내 마음 같아서 애써 반듯하게 펴본다. 물이 묻은 것인지 아니면 눈물을 떨어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자국을 손끝으로 쓰다듬는데 뭉개지고 흐려진 글씨처럼 가슴속의 선명했던 어떤 슬픈 감정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아직 나는 충분히 애도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좀 더 벌을 받아야지!’ 희미해지려는 미안함을 황급히 붙들어 편지와 함께 다시 상자 안에 봉인한다. 본래 자리에 상자를 돌려놓으려다 버리려고 쌓아둔 책더미를 무너트리고 말았다. 정확히 발등을 찍으며 떨어진 책 때문에 ‘끙’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느꼈지만, 곧 감각이 무뎌지면서 야릇한 쾌감이 찾아왔다. 갑자기 마음이 일렁인다. 그만 아파하고 애도를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나는 절뚝거리며 방을 나와 편지 묶음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러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 썰어둔 레몬 한 조각을 입 안에 넣고 정성 들여 씹는다.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강한 산성의 레몬즙이 저릿한 통증을 일으킨다.

  아버지의 죽음은 레몬의 신맛처럼 아주 강렬하고 구체적인 경험이었으며 그 아픔 역시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아픔은 경험할 때마다 아프다. 하지만 잠시나마 망각할 수 있다면 레몬을 씹는 온순한 자학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다른 레몬 한 조각을 꺼내 입안에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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