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시몽이 마음에 두고 있는 폴에게 함께 연주회를 가자며 설렘으로 건네는 질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처럼 젊었던 내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줄곧 묻고 했던 말이다.
“술, 잘하세요?”라는 상대의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시절은 지나버렸지만, 나와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보낸 시간의 기억은 언제고 그 시절 추억에 다시 취해들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처음 마셔본 술은 맥주였다. 외국에서 우연히 나와 비슷한 또래의 청소년들과 어울릴 자리가 있었다. 당시 17살이던 내게 누군가 맥주 한 캔을 건네주었다. 활기 넘치던 그곳에서 내가 그 자리에 얼마나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심정으로 급히 술을 마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것은 다행히도(?) 합법적으로 음주가 가능한 나이 이전에 내가 맛본 유일한 술맛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마신 술의 8할은 20대 때 마신 것인데, 가난했고, 건강한 간의 해독 능력이 든든했던 시절이라 주로 소주를 즐겨 마셨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나의 음주 생활은 가속이 붙어 친구들과 소소하게 자취방에서 나누어 마시던 것으론 성의 차지 않았다. 급기야 술이 세다고 소문난 몇몇 공대 선배들을 섭외하여 대학 내 유일무이한 ‘음주 동아리’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유일한 여자 멤버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엄청난 술빨을 가진 남자 선배들의 음주량에 지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도 마셨다. 어느 해 여름에는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 전망대까지 음주 여행을 떠났는데 각 지역의 전통주나 지역 소주를 경험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45도의 안동소주를 진탕 마시고 술병이 난 일도, 난생처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포항이란 도시에 와본 것도 그때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더 다양한 주종을 경험하며 나의 취향과 안목을 넓혔을 뿐, 그 시절 음주 감성은 서른쯤까지 계속되었다. 퇴근 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동시에 내일을 걱정하며 입안에 털어 넣던 술 한 잔이 왜 그렇게 달았을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술이 달지 않았다. 달라진 술맛에 적잖이 당황스러워 한동안은 주종을 바꿔가며 잃어버린 ‘그 맛’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 갑자기 미각을 잃은 것도, 전국의 양조장이 일제히 술 빚는 법을 바꾼 것도 아닐 텐데 어떤 노력에도 예전의 술맛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엔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달라서라고 짐작했지만, 곧 내가 더 이상 그 시절의 나와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낯을 가리는 사람이다. 숫기가 없어 잘 알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 있을 때 늘 긴장한다. 긴장이 풀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타입이다 보니 간혹 차갑거나 무심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래서 20대 때 나는, 되도록 나의 긴장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때로는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첫 만남부터 내가 얼마나 호쾌하고 매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면 정말 마법처럼 나의 긴장이 느슨해져서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나는 더 호탕하고 유머러스해질 수 있었다. 그런 술이 내게 달콤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나약한 모습이 새어 나올까 늘 경계하던 이, 삼십 대의 나는 그런 술의 힘이 특히 좋았다. 내가 대학생이던 어느 여름밤, 사람 구경을 목적으로 찾아간 인도 고아 해변의 Fullmoon 파티에서 나는 처음 만난 이들과 아름다운 달빛을 맞으며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 그날, 내가 기분 좋게 술에 취해있지 않았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끔은 불콰해진 마음 끝에 내가 누군가를 향해 품고 있던 미움과 원망이 한낱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되려 내 증오에 시달렸을 상대가 한없이 안쓰럽게 느껴지고 묵은 감정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는데 그것도 내가 좋아했던 술의 마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술의 힘에 너무 의지할 때면 꼭 문제가 생겨났다. 한 번은 대학 시절, 나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 A와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던 선배 B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술기운을 빌려 처음 만난 이들과의 어색함을 견디고 있었는데 갑자기 B가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다. 다들 어지간히 술에 취한 상태여서 B의 말에 “사귀어라!”를 외쳐댔고, 술기운으로 한껏 달떠있던 나는 그대로 B와의 연애 1일을 선언해 버렸다. 그렇게 나는 술에 취해 ‘의리도 없는 년’이 되었고 이후 도저히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아 한 달도 안 되어 B에 연애 종결을 선언함으로써 친구의 남자를 뺏어가 차버린 ‘몹쓸 년’의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그뿐 아니라 술에 잔뜩 취해 무작정 달리고 싶다며 문 잠긴 공설운동장의 담을 넘으려다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목발 신세를 져야 했는데 지금도 찬 바람만 불면 왼쪽 무릎이 시린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이다. 처음부터 술로 친해진 이들과는 술이 없는 만남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술기운을 빌어 끌어올린 각자의 에너지에 익숙해져 그것 없이는 서로가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나도 진지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요즘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내일의 일상에 대한 책임감이 술을 즐기고 싶다는 욕구보다 커져 버린 탓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술이 더 이상 달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내게 더 이상 술의 힘이 간절하지 않아서 그것의 달콤함이 사라져 버린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제 나는 낯선 이들 사이에서 긴장하는 내 모습이 그저 나의 한 부분이라고 인정했고, 모든 사람에게 단숨에 호감을 사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예전처럼 술의 힘을 빌려 나의 숨겨진 매력(?)을 발산하고자 애쓰지 않는다. 더 이상 “술을 좋아하세요?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어요?)라고 묻지도 않으며, 술에 취해 진짜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진짜 ‘으른’이 된 걸까?
술 마시기 좋은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지금껏 술 한잔 나누지 않았지만 깊은 공감과 끈끈한 연대로 빚어진 인연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이해하려 애쓰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발효하고 변주하며 깊이 숙성되어 간다. 이 계절, 그들과 함께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간절해진다. 과연 그 술맛은 어떨까?
*달뜨다:(동사)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조금 흥분되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시몽은 폴에게 함께 브람스 연주회에 가자고 요청하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질문한다. 보통 프랑스 사람들은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브람스 연주회를 권할 때는 상대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또한 실제로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보다 14살 연상이었던 클라라 슈만을 평생 짝사랑했다. 그러므로 시몽이 브람스를 좋아하냐고 묻는 것은 결국 폴에게 자기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과 동의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