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의 여행에 대해서 너무 쉽게 평가한다
여행이라고 하면 낯선 모험이나 나만의 장소 혹은 인생의 깨달음 등등 우아한 태그가 붙는다. 반면 관광이라도 하면 왠지 목에 카메라를 걸고 깃발 쫓아다니는 한 무리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좀 다녔다는 사람들은 여행이란 무릇 이래야 한다는 꼬리표들을 붙인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고개를 흔들며 무시한다. '모험심도 없나? 남들 다 가는 곳을 찍고 다니게. 아니, 기본적인 영어는 해야지 왜 자꾸 한국 사람만 찾아. 여행 온다는 나라에 대한 기본 이해도 없이 오나?'
그런데 여행과 관광에 대한 경계는 너무 모호하다. 이건 여행이 반복될수록 더 강하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닌 거 같다.
세계를 일주하는 ‘여행가’와 ‘관광객’ 사이의 목숨을 건 이념 다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 같다. 이런 다툼은 주로 잘난 척 뻐기는 자칭 ‘여행가’로부터 비롯된다. 여행가와 관광객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하며, 나아가 그런 경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나 자신을 보고 깨달았다. 특히 쿠바에서.
-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 마이케 빈네무트 -
어딜 가면 뭘 꼭 해야 된다는 것도 웃기지만 강박처럼 여행은 이래야 한다며 관광객처럼 보이는 건 절대 안 한다는 것도 못지않게 웃기다.
깃발 든 단체 여행객들이 우스운가? 게스트하우스 아닌 호텔에 묵는 건? 한 달 이하는 여행도 아니지? 유럽은 너무 흔하다 이젠 남미 정도는 가야지? 거기 그곳은 다들 가잖아?
이렇다면 남의 여행에 대해 너무 쉽게 평가하고 내 것만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나도 그랬다. 깃발 든 단체가 우습고 영어가 안돼서 가이드만 찾아대는 사람들도 우습고 국적기와 비싼 호텔만 고집하는 지인들의 여행에 어이없어하고, 혹시 내가 가는 곳이 남들 보기에 어떨지도 신경 쓰이며, 다인실이 거북해 호텔에 묵으면서도 내가 정말 여행다운 여행을 하는 걸까 싶기도 했다.
여행도 놀이다. 민폐가 아니라면 남의 놀이를 내 놀이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설사, 같은 놀이라도 처음부터 모두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반복할수록 어떤 면에선 노련해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새로운 방법들도 생기는 거다.
그럼 이 놀이는 어떻게 시작될까? 예전보단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여행은 손이 많이 가는 놀이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후회 없을 장소와 방법을 고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 결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못해 허탈하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라면 회의와 신중함을 자랑할 만한 사람들도 이런 요소들과 마주치면 원시적인 순수와 낙관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팸플릿만 보고도 강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는데, 사람의 계획이 (심지어 인생 전체도) 아주 단순하고 어설픈 행복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감동적이면서도 진부한 예였다. 또 가계에 파탄을 일으킬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긴 여행이 열대의 바람에 살짝 기울어진 야자나무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기도 했다.
-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
첫 시작인 여행지 선택이 이렇게 어이없게 즉흥적이고 우연이더라도 이 놀이를 계속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시작하더라도 반복되면서 달라지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 여행에는 기대감이 있다. 그것이 보고픈 절경이나 역사적 장소가 되었건 타지에 대한 막연한 이상향이나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모험이던. 이 못지않게 여행을 갔다 오면 내 현실이 좀 나아질 것 같은 기대감도 있다.
그러나 여행만 마친다고 인생을 자동 전환해 줄 방법이 생기거나 피하고 싶었던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짜잔하고 나타날 것 같은 답은 있지 않다. 어차피 사는데 '바로 이것'이라는 답은 흔하지 않다.
기대나 결과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조급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반영한다. 우리는 효율성이 중요한 후기 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다. 얻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하면 즉시 얻는 것이 있다는 구조에 익숙하다. 그래서 목표를 세우고 목적을 이뤘는데 당장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에 적잖이 당황한다.
흔하고 일상적인 것, 당장 표시 나지 않는 소소한 것들엔 눈길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건 독서와도 일맥상통한다. 남보다 조금 더 읽었을 땐 뭔가 남들보다 더 잘 아는 것 같고 남들의 몇 년 치를 단시간에 넘길 때면 몇 권의 '내 인생의 책'이 생기면서 무슨 경지에라도 오르는 것 같아진다. 그런데 읽는 책이 늘어날수록 즉석에서 주어지는 인생의 길이나 깨달음의 답이나 그런 건 없다. 단지, 소소하게 알아가는 이런저런 다양한 관점들이 있을 뿐이다.
인생의 전환점이나 죽기 전에 가봐야 곳 따위는 없다는 걸 반복하다 보면 더 확실해진다. 오히려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과 한숨 나올 것 같은 낙담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기도 한다.
그럼에도 돌아오면 다시 어딘가 갈 곳을 찾는 끊을 수 없는 이 놀이 매력이 뭘까? 과연 무엇이 이 손이 많이 가는 놀이를 계속하게 만들까?
반복될수록 '난 왜 여행을 하나?'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생긴다.
모든 여행은 어떤 면에서 낯설고 불편하다. 이미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런 것들을 부담스러워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한 것, 모호한 것, 혹은 역설을 싫어한다. 길을 잃거나 방향을 물어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불확실한 것을 잘 참아 주지 않는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고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산이 아니라 사막을 닮았다.
-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스티브 도나휴 -
그런데 내 생활 영역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고 오히려 없애야 할 미숙함과 부족함이 여행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바닥으로 추락한 내 능력과 준비 없이 닥치는 이 당황스러움은 사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만들어준다.
낯선 곳에서는 주의력과 관찰력이 확장된다. 더군다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그들에게 어리바리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며 그들에겐 당연한 시스템도 모르는 바보스런 이방인이다.
진정한 발견에 이르는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볼 때 이루어진다
- 마르셸 프루스트 -
내 일상이 흐르는 익숙한 곳에서는 이런 경험은 쉽지 않다. 오히려 몰라서 무시당하거나 바보스러움은 일상에선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것으로, 가능하면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당연히 주의력이나 관찰력보다 무의식과 습관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게 되어 버린다.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삶의 터전을 잠시라도 떠나는 것일 거다.
더불어, 여행 후 결과가 아닌 그 순간순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덤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실제로 강하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거대한 건축물이나 유명한 그림보다는 그 동네 근처 오렌지 나무 향기, 그림으로 배운 것 같은 어설픈 우동 한그룻, 출퇴근 시간에도 일상처럼 꽃을 사는 사람들, 음식량이 많으니 주문은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는 식당 웨이터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매 순간의 평범하지만 독특한 기억들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내 일상에 대한 익숙한 시각을 조금씩 흔들어놓는다. 그리고 운 좋게도 괜찮은 질문 하나 생긴 채 돌아올 수 있다면 그 여행 자체가 꽤 좋았다고 생각될 것이다.
지난 여행들의 사진을 보다가 문득 여행에 대한 정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든 경험은 그 순간 강렬하게 다가오고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그 경험을 되돌아 사유하며 작은 성찰이라도 생긴다면 더 값지지 않을까? 글을 쓰는 것은 돌아보고 정리하면서 그 당시와 또 다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사고라는 요소를 전혀 내포하지 않고 의미를 가진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 - 존 듀이 -
그럼 일기를 쓰면 되지 않나? 굳이 남들이 보도록 글을 올리는 이유가 뭘까?
나도 여행 글들을 읽으면서 비슷한 장소와 내용, 일기에 가까운 내면을 쓰는 이유가 궁금했다.
떠나지 못한 이들에게 자랑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평범하고 진부한 어디 가서 뭘 했다와 내 인생의 어쩌고 저쩌고는 도대체 왜 쓰나 싶었다.
그러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아마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것이 보이기 위한 자랑이던지 머리 속에 떠오른 질문이던지 아님 삶에 풀리지 않던 궁금증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던지...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도 좋은 질문 하나 던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다.
다녀온 여행들 기억도 되짚어보고 다시 질문도 해보고 싶어 나도 그 진부한 글 대열에 서기로 한다. 내 게으름이 더 방해하기 전에 한 발을 먼저 이렇게 디뎌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