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며 걷는 여행
열 번에 한 번 정도 이런 여행도 있다. 모든 날이 좋은 그런 여행.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 드라마 도깨비 -
보통 기대에 실망하고 동행자에 절망하며 돌발상황에 난감한 경우가 한두 번은 있다. 사실 곤란한 상황들이 사유에는 도움이 된다. 질문과 생각이 반복되면 쓰고 싶다. 쏟아내고 정리하고픈 거다. 그러니 평온하고 다 좋은 여행에는 쓸 내용이 없다. 인간은 고통에 더 예민하지 않던가.
나를 알아가는 길에는 여행도 있다. 낯선 곳에선 몰랐던 내 모습을 포함한 각종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내 취향도 알게 된다. 나만의 취향저격 장소를 찾는 기술이 발전하는거지.
호이안은 정확히 내 취향저격 장소이다. 다낭에서 반나절 코스인 이 곳에 난 5일을 머물렀다. 여행지를 설명하는 가장 경박한 말은 '거긴 반나절 정도면 충분해'라는 거다. 세상에 어디가 반나절로 충분한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집 앞 올림픽공원도 반나절로는 부족하다.
서울에 연남동이나 서촌의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호이안도 좋을 거다. 머무르며 걷는 여행을 좋아한다면 우기 마지막인 1월 말 2월 정도를 추천하겠다. 걷기 적당한 늦여름 초가을 날씨다. 걷기엔 쨍한 해보다 부슬거리는 비가 오히려 낫다.
관광객이 몰아치는 오전과 야경에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오후쯤 거닐면 한적하게 골목골목 거닐 수 있다. 세월이 쌓인 노란 벽들이 이끼 낀 기와를 얹은 채 옹기종기 길을 이룬다. 서울도 재개발로 밀어내는 거 말고 고쳐 쓰는 방법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아파트 공화국 대신 이런 골목길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도시는 이전 시대의 흔적을 박제로 보존하는 창고가 아니다. 자기가 거기 살지 않는다고 해서 비 새는 집을 보존하라고 목청을 높일 수도 없다. 도시는 살아 있어야 하고 새로운 제안을 통해 계속 변화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도시는 선택받은 강자에게 맡겨진 스케치북이 아니다. 전당포 노파에게 도끼날을 들이댈 자격을 지닌 시장과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해야 한다. 들춰보면 과거의 증언이 들려야 한다.
- 빨간 도시 | 서현 -
그림이나 소품이 관심이 많다면 작은 가게들을 끊임없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동네에 작은 갤러리도 소품 가게도 많다. 여행지의 소품이 거기서 거기인데 여긴 결이 좀 다르다. 업어가라 외치는 그림들 앞에서 자주 발을 돌려야 했다.
북적이는 소리가 힘들 땐 길 옆 작은 골목으로 한 발짝만 들어가도 고요해진다. 그런 카페에 앉아 나지막한 돌담이나 맞은편 작은 집을 보며 차 한잔하면 명상하는 기분이다. 골목 사이를 돌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궁금해지면 박물관으로 간다. 그림 보며 오르다 맨 위층에 서면 동네 전경을 한눈에 보여 준다.
새벽 녁 동네를 걸으면 풀어놓고 키우는 동네 개들과 아침 산책도 같이 할 수 있다. 아마 새벽 동네 돌기가 그들의 첫 일과인듯하다. 등교하는 아이들, 출근하는 사람들, 그들만의 아침 식당이 관광지이지만 동시에 살아가는 삶터라고 슬쩍 내보인다.
관광지로 북적이면 보통 삶의 모습들은 사라진다. 그런 곳엔 현지인만의 장소가 없다. 예를 들면 학교나 미용실 그리고 시장. 누가 잠깐 여행 와서 학교에 다니며 머리를 하겠는가? 다행스럽게 호이안에는 아직 있다. 두런두런 둘러앉아 저녁 식사하는 아이들 가득한 가족의 모습이 열린 집 안쪽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베트남은 젊은 나라다. 유럽에서 지긋한 연세의 어른들이 어디에나 일하신다. 그 나름대로 느긋함을 준다면 베트남은 젊은 생기로 가득하다. 까르르 웃는 무리 진 아이들을 본 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나를 향해 활짝 웃는 가게 점원을 보며 젊다는 것만으로 참 이쁘다는 걸 다시 느낀다.
여행이 지나면 두고두고 맴도는 건 '우와'의 순간이 아니다. 나지막이 '아...'라고 나오는 것이다. 매 순간 호이안에서 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든 날이 좋았던 이유다. 돌아가 문득문득 여기를 많이도 그리워하겠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