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덜컥 가게는 얻었고 물건도 주문해 점점 가게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장기요양 기관이다 보니 구청에 복지전문가들 앞에서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 그래야 지정서가 나오고 복지용구점으로 승인받게 된단다. 산 넘어 산이다.
프레젠테이션은 무슨 먹는 거예요? 해 본 적도, 남들이 하는 거 본 적도 없다. 그래도 시작했는데 해보긴 해야 하니 PPT자료를 만들고 낮이고 밤이고 틈만 나면 연습했다. 핸드폰으로 녹화해 다시 보고, 신랑 앞에서도 한 번 해보고 지적질해 대는 소리에 열받았지만 참았다. 붙으면 보자 하는 마음으로.
다행히도 연습량 때문인지 당일 날 하나도 떨지 않았고 덤덤하게 마칠 수 있었다. 만약에 탈락이라도 하면 석 달에 한 번밖에 없는 지정심사를 기다리며 피 같은 가게 세 내면서 영업은 못하게 되니까! 건물주만 좋은 일 시켜야 하니까! 절대 떨어질 수 없어! TMI 5팀 중 2팀 붙었습니다 ;)
그렇게 1주일 후 합격이라는 소식과 지정서가 나왔고 장기요양기관으로 복지용구 판매점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어려운 산 넘었으니 가게 오픈만 하면 온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 오셔서 장날 저리 가라 할법한 가게가 될 거라는 착각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게 꿈깨라.'이야기해 주었다. 하루에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는 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그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누군가 가게에 들어오는 소리 만들 리면 조건반사처럼 벌떡 일어나 인사했건만… 늘 잡상인들이었다. 노란 우산공제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사람, 애터미 사업하라고 하는 사람, 나 양말 많이 파는데 몸이 불편하신 분이 양말 팔러 오시거나 대일밴드 팔러 오는 사람, 신문받아보라고 오는 사람, 어려운 아이들 식사 지원에 쓴다고 돈 기부하라고 하는 분들....
네네 다들 알겠는데요. 저도 좀 살아야 하거든요. 당장 나가야 할 돈이 많아요.
대일밴드도 사고 양말도 사고 아이들 라면 산다는데 돈도 드렸다. 애터미 선그림도 사고 사업이야기도 많이 들어 드렸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나날을 보냈다. 깨끗한 선반을 하릴없이 닦거나 심심하면 다이소에 들러 매장에 장식할 만한 것은 없는지 둘러봤다가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거래처에서 새해에 나눠줬던 다이어리에 일기를 끼적였다. 그러다 내가 궁금한 건 어디에서 검색하지? 하고 떠 올리다 네이버 블로그가 생각났다.
"그래 블로그!"
어르신을 모시는 분들께 도움이 될만한 정보와 매장이 위치한 지역 행사, 할인정보 등 많이 검색할만한 내용들을 써보기로 했다. 매일 TO DO LIST에 넣어 출근하면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되었다. 블로그를 시작한 지 10개월 남짓 되었는데 정보성 글을 중심으로 쓰려 노력하지만 결국 늘 아무 말 대잔치다. 누가 어떻게 보는지보다 일단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 꾸준히 하다 보니 포스팅은 200개가 넘었고 너무 감사하게도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오셨다는 손님들이 가뭄에 콩 나듯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난달보다는 이번달이 나아지고 다음 달이 쪼끔 나아지는 아주 완만한(?) , 거의 평지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도 손님이 북적대는 가게는 아니다. 가끔 바빠서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릴 때도 있지만 보통의 날들은 이렇게 글을 쓰거나 책을 보거나 잡무를 처리한다.
그래도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잡상인들 말고 동네 어르신들이 쉬어가는 가게가 되었다. 고스톱 치러 가기 전에 들러 믹스커피도 한잔 하시거나, 속 답답한 이야기 풀어놓고 가시거나, 과일 챙겨 오셔서 같이 깎아먹자고 하시는 사랑방이 되었다. 떡국 많이 샀다고 한 봉지 담아와 주고 가는 박스할머니, 붕어빵 따뜻하다고 먹으라고 주시는 손님, 늘 커피 얻어 마시니 미안하다고 생과일주스를 사 오시는 조 씨 할아버지. 몇 달 전(더 초보시절) 설치가 서툴러 어눌하게 작업해도 괜히 힘든 일 시킨 거 같다고 미안해하시고 고맙다고 하시는 멋쟁이 할아버지, 늘 먹을 것 챙겨주시며 통통하게 만들겠다고 하시는 주차장 사장님.
남들이 그러더라. 힘든 건 성장하고 있어서 힘든 거라고. 성장 중임을 되뇌며 견디고 버텨본다.
다시 겨울이 오고 있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지난겨울만큼은 춥지 않을 것 같다. 남의 동네 같던 이곳 구석구석 길도 훤히 알게 되었고, 눈 맞추며 인사 전하는 분들도 많아졌다.
다들 "이제 장사는 좀 됩니까?" 물어 오신다.
"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요" 하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아무래도 난 재물 복보다는 인 복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이번 겨울은 좀 덜 춥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