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7 : 박구용 교수 철학 원정대 참가기 2
방향도, 속도도 시각으로 분간할 수 없는 폭설이 휘날린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얼어붙은 맨발의 본능으로 휘휘 저어 내려간다.
배고픔으로 울음소리마저 잦아든 업은 아이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은 지 오래다.
내 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절망적인 기정사실이,
뒤지면 뭔가 있을 거라는 간절한 확신으로 바뀌어 그저 내 집으로 향한다.
무슨 소리가 났을까?
무엇이 내 몸을 뚫었을까?
꽁꽁 언 내 몸의 감각은 총알이 주는 충격보다 훨씬 늦다.
따뜻함이 온몸에 퍼질 때 시야는 흐려진다.
아이는?
아이는!
모든 소리가 사라진 절대적 정적 속에서,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그녀의 시린 발자국만 남았다.
하얀빛이 내린다.
'제주 4.3 평화 공원' 안에서 가장 뇌리에 깊은 것은 '비설(飛雪)' 조각상이다.
스물다섯의 꽃다운 여자는 맨발의 고통보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어미의 본능으로 그 폭설을 헤집고 내려왔으나 토벌대의 총성에 스러진다.
어떡하든 아이만은 지키려고 잔뜩 구부린 작은 몸의 절박함이 그대로 투영된 조각상 앞에서, 같은 어미로서 비통함에 저리는 가슴을 이처럼 적어 위로와 공감을 표현했다.
공원의 지면보다 낮게 조성된 조각상까지 제주도 현무암으로 쌓은 미로 같은 담을 따라 들어가면, 청동의 모녀상이 나오는데 목도의 충격이 컸다. 조각상은 본관인 기념관과 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참살을 당했다는 여러 고증으로 그 역사성을 살리고자 이곳에 설치했다고 한다.
이 조각상이 지면보다 낮은 곳에 자리 잡은 것도, 바로 조각을 노출하지 않고 달팽이 형 미로로 따라 들어가야 드러나는 조각상의 모습도, 모두 비극의 역사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맞으라는 작가의 의도였을까? 우리의 발밑에 그냥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선행 지식 없이 마주한 조각상의 비극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4.3에 대한 나의 무지가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봉개동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변병생(당시 25세)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거친 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토벌대에 쫓겨 피신도중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후일 행인에 의해 이 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모녀상(母女像)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 두 생명을 기억하고자 하여 제작하였다.
비설(飛雪)은 '쌓여 있다가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뜻한다. 눈보라가 치던 한겨울,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안타깝게 죽어간 모녀의 모습을 마치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비설의 의미와 중첩시켰다.
옛날 어머니들이 불러주던 자장가 '웡이자랑'이 새겨져 있는 돌담길을 따라 모녀상에 다다르면 눈밭 위에서 웅크린 채 죽음을 맞은 어머니와 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4.3 특별법 개정 이후 2008년 4.3 평화 공원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2025년. 그 사이 17년 동안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 수학여행 인솔을 몇 번 했었지만, 한 번도 4.3 항쟁과 관련된 유적지를 코스에 넣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기획 업무를 맡은 건 아니었지만, 진즉 이 고통의 역사를 피상적으로만 아닌 요번 이틀의 여정만큼 정확하게 이해했더라면 분명 제안했을 텐데...... 아쉽고 부끄러웠다. 바로 현직에 있는 친한 교사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며 내년도 수학여행에 꼭 참고하라는 말을 부탁했다.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공론화하여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한 역사는, 이념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기게 한다.
현무암 담을 따라 다시 공원 지면으로 걸어 나왔다.
'어미'의 이름으로 그 처절한 고통에 공감했던 순간은 오랫동안 먹먹한 잔상으로 남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어미로서, 내 자식보다 어린 나이의 모녀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 땅에 무고한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적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재발 방지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