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2; 성인아들과 공존하기
아드님은 유학 준비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논문 때문에 근 석 달이 넘도록 집에 오지도 않았다.
논문이 통과되고 나서도 유학 장학금 신청을 알아본다는 소식만 가끔 카톡으로 보내올 뿐이었다.
그것도 먼저 물어봐야 답이 올 뿐이었다.
00 재단에서 주최한다는 것과 주말에 필기시험을 본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자꾸 물어보면 귀찮아할까 봐 J씨는 자력으로 폭풍 검색해서 시험 장소와 시간까지 완벽하게 찾아냈고 근처 맛집 검색까지 해 놓았다. 해외여행에서 사 온 운동화도 전해 주고 6시간 동안 시험을 보고 파김치가 되어 나올 아드님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서프라이즈까지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긴 시험으로 녹초가 된 아드님이 터벅터벅 걸어 나올 때 살며시 뒤로 가서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수고했다는 말과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방문에 깜놀의 표정과 함께 활짝 웃을 아들의 얼굴!
그 상상만으로도 J씨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그러나 그 상상은 말 그대로 드라마에서나 나올 얘기이고 가당치 않은 현실을 바로 자각했다.
왜 가당치 않냐고?
한마디로 아드님은 츤데레였다.
J 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아드님은 자기 절제력이 뛰어나서 절대 즉흥적으로 뭘 하는 성격이 아닌 반면 흥부자인 J 씨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 여러모로 아드님과는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J씨가 기억하는 그 시작은 아마 아드님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을 때였다.
신호 대기 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댄스음악에 J씨는 핸들 위로 손장단을 맞추며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부르고 있었는데, 옆 좌석의 아들이 “자중하세요.”라며 아주 조용히 차창의 버튼을 올리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서프라이즈로 진행했다가 엄근진 아들의 눈총을 받을 것이 뻔했기에 자존심을 굽히고 납작 엎드려 톡을 보냈다. 역시 예상대로 아드님은 한마디로 거절했고 그 거절의 이유는 다음 주 내려갈 텐데 뭐 하러 번거롭게 올라오냐며 누가 봐도 오버는 엄마인 것처럼 몰고 갔다.
그렇게 카톡 대화 중에 아들의 진심이 나왔는데... 그 첫마디는 ‘계획에 없던 일이잖아요....’였다.
‘아....계획에 없던 일이라.... ’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만나고 말 것이다.'라는 이상한 오기까지 생겨 J씨도 지지 않고 카톡을 이어갔다.
-계획에 없던 일이 뭐가 그리 큰 문제인데? 엄마가 일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 만나서 점심 먹고 놀다가 저녁에 아들 만나 얼굴도 보고 밥도 같이 먹고 내려가겠다는 게 뭐가 그리 큰 문제인데....?
-큰 문제는 아닌데 미리 안 알려주셨잖아요! 제 머릿속에는 대충 그려 놓은 계획이 있는데....
-선약 없다며? 선약 없으면 같이 먹자는 제안이 뭐가 문제야? 결국 나랑 같이 먹는 게 안 당긴다는 소리구나....
20분의 뜸을 들인 후 최후통첩은,
-그건 아니에요.... 음.... 알았어요... 같이 먹어요...
그렇게 비굴하게 아드님을 영접하기로 한 날.
J씨는 전시회도 보고 백화점에서 양산을 사고 시간을 보내다가 드디어 시험장으로 시간 맞춰 달려가 아드님과 상봉했다. 친구를 만난다는 하얀 거짓말은 J씨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챙겼다.
석 달이 넘도록 못 본 아드님은 많이 야위어져 있었다.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노고가 한큐에 보이자 서운한 감정보다는 짠한 애달픔이 앞섰다. 다가가서 “많이 힘들었지?”라며 어깨를 두드리려는 찰나
아드님은 “친구분은 잘 만나셨어요?”라며 자연스럽게 J씨의 손을 내렸다.
머쓱한 J씨는 아들 옆에 붙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시험은 어땠냐? 저녁은 뭘 먹는 게 좋겠냐? '는 등 미주알고주알 질문을 쏟아부었다. 아들은 “그냥 그랬어요.”라며 모든 질문을 그 한마디로 퉁쳤다.
얼굴 표정을 살펴보니 시험을 못 본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드님은 시험 출제의 비논리성과 편협성을 쭉 읊으며 편치 않음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배 안 고프다며 그냥 기숙사에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서운함이 앞섰지만, 시험을 못 본 아드님이 훨씬 더 속상하리라는 생각에 간신히 달래어 미리 봐둔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서울의 맛집은 왜 그렇게 줄이 길까? 속칭 맛집 웨이팅의 비효율성을 누누이 강조해 온 아드님의 성정을 이미 잘 알기에 J씨는 눈치를 살폈고, 10분 이상 기다릴 시에는 딴 곳으로 간다는 마지막 타협으로 간신히 줄을 섰다. 다행히 아드님은 핸드폰 검색으로 15분이 지날 때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J씨는 아들이 눈치챌까 하는 조바심과 빨리 호출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줄타기에서 아슬아슬하 버티고 있었다. 결국 아드님은 10분이 훨씬 더 지난 것을 알아채고는 바로 “어머니, 딴 데로 가죠....”라며 최후통첩을 꺼내는 순간, “5번 분 들어오세요.”라는 종업원의 호명이 마치 구세주같은 타이밍으로 그 말을 삼켜버렸다.
“저는 소화가 안 될 거 같아서 안 먹을게요. 1인분만 시키세요.”라는 말에 어떻게 두 명이 와서 고기를 1인분만 시키냐며 2인분을 시켰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J씨는 딱 두 점만 먹었다.
배 안 고프다고 했던 망할 놈의 아드님은 구워지기가 무섭게 입속으로 직행했고, 몇 끼 굶은 사자처럼 추가로 시킨 2인분까지 싹싹 다 먹었다.
더 시키지 말라는 아드님의 손사래에 J씨는 ‘나쁜 새끼.... 지가 다 먹고는....’를 속으로만 웅얼거리며 후식으로 시킨 칼국수로 배를 채웠다.

한 시간여의 저녁 식사는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먹는 데만 충실하게 끝났고, 2차까지 예상하고 아홉 시 반으로 예약한 귀성 버스 시간은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버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으니 가볍게 생맥주라도 하자는 J씨의 제안에 아드님은 스터디 준비해야 한다며 단칼에 거절했고, 지금 가면 8시 차는 탈 수 있을 거니까 당겨서 타라며 불필요한 친절까지 보이셨다.
그렇게 고깃집에서 나오자마자 모자는 작별을 고하고 칼같은 아드님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지하철 역사로 사라졌고, J씨는 5%의 페널티를 물고 차표를 교환하여 8시 차로 당겨서 승차했다.
겨우 500원이었지만 너무나 억울했다. 그 페널티가 마치 아드님의 삶에 막무가내로 끼어든 대가로 느껴져 아주 씁쓸했다.

J씨는 아들만 둘이다.
큰아들은 외국 여자와 사랑에 빠져 그 나라로 간지 벌써 일 년이다. 해외동포가 되었다.
작은 아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영재로서 시나브로 나라의 아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며느리의 남편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최고의 멍청이라는 웃픈 현실이 J씨의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지금 J 씨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자립 갱생’이었다.
육아와 자녀 교육에 허덕거리던 30~40대에 그렇게 바랬던 자유가 드디어 눈 앞에 펼쳐졌는데, 정작 붙잡은 건 '외로움'이라니...!한심한 자신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해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외로움 대신 ‘스텝’을 밟는 것.
그동안 타인의 시선 때문에 주저했던 댄스스포츠에 등록하면서 J씨는 드디어 진짜 자유의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