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3: 중정이 너무 아름다운 '이사벨라스튜어트가드너 뮤지엄'
아들 친구 J의 여자 친구를 저녁초대하여 식사를 했던 날, 그녀는 나한테 '이사벨라스튜어트가드너 뮤지엄(IsavellaStwartGardner Museum)'을 꼭 가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J가 짚어준 5개의 꼭 가야 할 곳에 있었던 곳이기에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녀도 강조하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박물관은 보스턴 서남쪽의 펜웨이(Fenway)에 위치하였는데, 도보로도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MFA (보스턴 미술관), 보스턴 심포니홀(Boston Symphony Hall)과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Fenway Park)가 있었다.
왼쪽 초상화가 이 박물관의 창립자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Isabella Stewart Gardner, 1840–1924)인데 미국의 저명한 예술 후원자이자 미술 수집가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부부의 꿈이었던 박물관을 1903년에 설립했다고 한다.
미국의 물가를 반영하듯 모든 티켓은 다 비싼 편이다. 이곳도 22불(한화 31000원 정도)의 성인입장료를 받는데 여러 가지 무료나 할인의 정보도 있지만 제일 재밌는 사실은 '이사벨라'라는 동명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평생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른쪽)
박물관 전관은 사면이 모두 유리로 된 마치 거대한 온실을 연상케 하는 초현대적인 건물이었다. 입장을 하고 뒷 건물까지 역시 유리로 된 긴 회랑이 있었고 그 유리통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순간 시간의 막을 걷고 중세의 비밀 정원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앞 건물의 환한 자연광과 투명한 공간감은 회랑의 끝에 다다르자 갑자기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어두움은 관람객들을 덮치고 그 어두움이 조금 익숙해질 무렵 화려함을 장착한 중세 유럽의 궁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중심에는 고풍스러운 장식과 화려한 꽃 그리고 자연광으로 채워진 Patio라고 불리는 중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15,000점에 달하는 보물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볼까를 고민하면서 중정에 앉아 화원을 감상하였다. 작품들이 있는 룸들은 어두운 조명이었으나 파티오는 인공의 조명 한 개도 없이 오로지 천장의 유리로부터 들어오는 자연광으로만 그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었다.
총 3층에 걸쳐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기에 동선을 줄이기 위해 먼저 1층부터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 박물관의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의 「엘 잘레오(El Jaleo)」이다.
El Jaleo는 스페인어로 '소란, 소동'을 뜻하며, 플라멩코 공연에서 관중이 열광하며 외치는 고함소리, 박수, 발구르기 등을 포함한 즉흥적인 환호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흰색 스커트를 입은 여성 무용수가 역동적으로 플라멩코를 추고 있고 왼쪽에는 기타리스트와 남성 관객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아치형 벽기둥에서 좀 더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그림은 다른 곳은 어둡게 처리하였고,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조명 덕에 무용수의 얼굴과 치맛자락이 강렬한 하이라이트 효과를 받아 그 역동성은 극대화가 되었다. 그 아름다움과 빛의 조화에 넋을 잃고 한동안 감상하였다.
그런데 이 박물관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작품명과 작가명을 표시해 놓지 않았다.
제목과 작가를 먼저 보고 선입견을 가지고 그림을 감상하는 데에서 탈피하라는 의도는 알겠지만, 15,000점의 모든 작품을 그런 식으로 감상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더욱이 문외한이 대부분이 관광객들에게는 좀 어처구니가 없는 의도라고 여겨진다.
그나마 전시실마다 QR코드를 안내해 놓았고 그 링크를 따라서 들어간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꼭 봐야 할 것과 맘에 드는 작품을 살펴보느냐 품이 아주 많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먼저 'ChineseRoom'의 저 QR코드를 카메라로 찍으면(사진 1), 'ChineseRoom'의 디지털 아카이브로 연결되고 간단한 설명을 구글 번역을 통해 확인한다. (사진 2) 대표 작품들을 클릭하면 그 작품들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또 저 방 모양을 클릭하면 (사진 3) 방의 구조가 보이면서 각 작품의 번호와 그 설명이 아래 나온다.(사진 4)
이쯤 되면 내가 왜 제목을 '친절하지 않은 박물관'이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방(전시실)은 토털 27개이고 방마다 저런 절차를 거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고 차차 사람을 지치게 하였다.
그래서 꼭 봐야 하는 작품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Titian)의 《유로파의 강간 (The Rape of Europa)》으로 16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 중 하나이다. 이사벨라가 자신이 죽으면 관을 이 그림 앞에다 두고 추모해 달라고 할 만큼 그녀가 가장 아끼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서사를 담은 작품이다. 제우스가 페니키아 공주 유로파(Europa)에게 반하여 하얀 황소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접근하였고, 유로파가 황소의 등에 올라타자, 제우스는 그녀를 납치해 크레타섬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유로파는 미노스왕을 낳게 되었고 유럽(Europe)’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직관한 느낌은 그다지 이사벨라의 감상에 닿지 못했다. 일단 하얀 황소가 우리가 아는 황소의 모습이 아닌 양 언저리쯤 되는 듯했고, 붉은 천을 흔드는 유로파의 절규가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음은 너무나 인상적인 마네(Édouard Manet)의 《마네 부인의 초상 (Portrait of Madame Manet)》이다. 어두운 배경과 단색 옷차림은 얼굴의 표정과 손의 제스처에 시선을 집중시키게 하는데,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눈을 마주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다른 작품에 비해 붓터치가 보일 정도로 거친 것이 특이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이자벨라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과 가톨릭 성미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많은 종교적인 예술품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은 수도원 같은 구조로 설계되었으며, 전시 방식도 성스러운 공간처럼 꾸며져 있다고 한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의 <성모의 죽음과 승천>은 금박을 이용한 목판화이다.
두 개의 주요 장면을 두 개의 패널로 구성한 르네상스 초기의 작품이다.
아래는 성모 마리아가 금색 천으로 덮여 관 위에 평화롭게 누워 있고 주변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고, 중앙에 예수가 등장하여, 마리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위는 성모의 승천(Assumption)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름 위의 마리아는 천사들의 합창에 둘러싸여 하늘로 승천하고 있고 맨 위에서 푸른 로브를 두른 예수그리스도가 팔을 벌려 어머니를 맞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화려한 금박과 섬세한 묘사가 프린트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복도와 여러 방에서 발견되는 이것의 이름과 용도가 너무 궁금하였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방법으로 찾아보니 '합창단의 의자'라고 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에서 성가대원들이 사용하던 좌석으로 예배 중 기도, 찬송, 묵상을 위한 공간이었다. 정교한 조각과 장식으로 꾸며져 신성함과 경건함을 한층 더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저 작품을 만든 이는 저 의자에 한 번도 못 앉아봤을 거라 여겨지니 지금도 그렇지만 누리는 자와 제공하는 자의 갑을관계가 느껴진다.
다양한 합창단의 의자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호두나무와 밤나무로 제작된 15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합창단 의자는 도미니코 수도회 교회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특히 상단의 조형물과 조각들이 유려한 곡선미가 눈을 끌었다. (왼쪽과 중앙)
물질의 풍요 속에서도 그 가치를 허투루 쓰지 않고, 오히려 후세에 길이 남을 유산으로 바꿔낸 이사벨라에게 감사의 마음이 든다. 그녀가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의 미적 안목과 열정을 담아 모은 수많은 예술품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크나큰 문화적 축복으로 다가왔으니까...
이러한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 간송미술관의 창립자 전형필 선생과도 어딘가 닮아 있다.
두 사람 모두 부유함을 일신의 향락이 아닌,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그 결은 많이 다르다.
이사벨라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취향에 따라 사적인 차원에서 수집 활동을 펼쳤다면, 전형필 선생은 나라 잃은 시대, 조선의 문화재가 해외로 흩어지는 비극을 막고자 사재를 기꺼이 내던진 사람이었다. 그의 수집은 곧 문화의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폐관 시간은 5시였다.
그러나 4시 반부터 각 전시장에 배치된 안내원들은 관람객들에게 다가와 “30분 남았습니다, 20분 남았습니다…” 하고 조용히 일러 주었다.
우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사람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끝까지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한 나를 포함해 몇 명에게는 5분 단위로 친절한 목소리로 시간을 알렸다. 나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떼지 못한 채, 미안하다는 인사를 예의 있게 건네며 조용히 전시장을 나섰다. 남은 건 긴 시간 서 있었던 다리의 통증뿐이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 기념품점에서 마그넷을 하나씩 사 모으는 취미가 있다.
그래서 돌아 나오는 길, 당연히 마지막 목적지는 기념품점이었다. 흥미로웠던 건 그곳은 5시가 훌쩍 지났는데도 아무도 손님을 재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십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매대를 둘러보며 지갑을 여는 그 풍경 앞에서 누구 하나 폐점 시간을 알리는 재촉은 하지 않았다.
시간의 촉박을 알렸던 미술관의 공간과는 달리 이곳만큼은 시간의 문이 느슨하게 열려 있었다.
예술의 이름으로는 정갈하게 쫓아냈고, 자본의 이름으로는 너그럽게 붙잡았다.
그 두 얼굴을 조용히 목격한 건 아마도 나 혼자였을 것이다.
그런 미세한 균열은 원래 외골수에게만 보이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