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1. 보스턴 재외공관에서 행사한 21대 대선 투표.
Visitor인데 Resident처럼 지내요.(11)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의 내란 행위로 인해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가 늦어도 3월 초에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언론마다 쏟아져 나왔을 때만 해도, 출국 예정일을 고려하면 사전투표는 무리 없이 마치고 떠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번 주엔 이루어진다’는 희망 섞인 관측은 한 달 넘게 이어졌고, 마침내 4월 4일에야 헌재의 판결이 내려졌다. 그제야 출국 전 사전투표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고, 마음 한켠이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나에게 투표란 ‘겨우 한 표’가 아니라, ‘내 한 표라도' 였기 때문이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다 재외선거가 반드시 외국에 적을 두고 사는 재외동포뿐만 아니라 나처럼 여행자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작년의 총선의 내용만 올라와 있고 아직 대선 얘기는 없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수시로 홈페이지를 들락거렸고, 마침내 재외선거에 대한 공고가 올라온 날 나는 4월 24일까지 신청을 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아들을 독려하여 둘 다 신청을 마쳤다.
그 뒤 48시간 내에 전자우편(E-mail) 주소 유효성 검증을 완료하라는 이메일을 받아 검증의 절차를 거쳤고 일주일 뒤쯤 이메일로 접수증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접수증을 받은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국시간으로 드디어 5월 24일!
우리 모자는 아침 11시에 집을 나섰다.
'제21대 대통령 재외선거'는 5월 20일~25일까지 엿새간 진행되었지만,주중에는 바쁜 아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출근을 하지 않는 토요일에 같이 가기고 이미 약속을 하였다. 투표 장소는 ‘보스턴 영사관’과 ‘보스턴 한인회관’ 두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아들은 둘 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보스턴 영사관이라 당연히 보스턴 시내에 위치하는 줄 알았는데, 뉴튼(Newton)에 있었다. 지도에 보이듯이 찰스강을 중심으로 보스턴, 뉴튼, 캠브리지, 서머빌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어서 그래봤자 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였다.
솔직히 보스턴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지역의 이름이 생소하였다. 그 유명한 하버드나 MIT도 다 보스턴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하버드나 MIT는 캠브리지에 자리잡고 있었고, 한국 보스턴 영사관은 뉴튼에 있었고, 아들 집은 서머빌에 있었다.
'백문이불여일견'은 확실히 진리이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아무리 영상이 발달 되었다 하더라도 내 발로 직접 다녀봐야 거리감과 방향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출발할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공관에 도착하자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하는 재외투표!
마지막이 될지는 아직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재외공관에 가서 투표를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설레었다.
영사관은 큰 빌딩의 2층에 자리하고 있었고, 보스턴에 유학 온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1층에서 안내를 해줘서 우리는 쉽게 영사관을 찾을 수가 있었다.
영사관은 생각보다 작았다.
일반 사무실 느낌이었는데 환한 미소의 흑인 아가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생각보다 사람은 많지 않았고 열 명 남짓이었다. 입구 벽에는 투표하는 순서와 촬영 금지에 대한 안내 그리고 후보자 사퇴에 대한 내용이 붙어있었다.
우리는 여권을 제시하고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쳤다.
전자서명을 한 후 곧이어 그 자리에서 출력된 투표용지와 노란색 회송용 봉투를 건네받고 기표소로 들어갔다. 사십여 년 가까이 투표를 해 왔지만, 이번처럼 마음을 다잡고 진지하게 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혹시 잉크가 묻어날까 봐 잠시 텀을 두고 용지를 반으로 접어 회송용 봉투에 넣었다.
문득 지난 12월 14일 국회의원들이 윤석열 탄핵소추안을 표결하던 날, 어떤 의원이 혹시라도 기표를 잘못해 무효표가 될까 두려워 손끝에 온 신경을 모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마 내 마음도 그 의원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게 투표를 마치고 나와 화장실에 들렀는데 젊은 아가씨 두 명의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남들은 열 시간씩 운전해 와서 투표하는 거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쉽게 했네요. 제 친구는 왕복 6시간 운전하고 가서 투표했다는데 요번 선거가 좀 중요해요! 안 하면 안 될 거 같아 운전의 압박을 감수하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외국에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얘기가 그냥 흘러 보낼 말은 아닌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깨어있는 지성이 모여 집단지성이 되고 그 집단지성이 민주를 지키는 가장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 나라의 운명에 깊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돌아오는 길.
지난번에 아들과 함께 텃밭 한 켠을 둘러보며 빈 공간에 방울토마토를 더 심으면 어떻겠냐는 아들의 제안이 문뜩 떠올랐다. 며칠 사이 내린 비 덕분일까? 열흘 전에 심었던 방울토마토 세 그루가 제법 든든하게 자리를 잡은 모습이었다.
근처 모종 가게에 들러 방울토마토 세 그루와 상추 두 포기를 사 들고 돌아왔다.
막상 심어보니, 새로 들인 모종들은 불과 열흘 전에 심은 것들과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먼저 자리를 잡은 모종들은 이미 진주만한 파란 방울토마토를 매달고 있었고 키도, 굵기도 새 모종과는 두 배 정도 차이가 났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얼마나 단단히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기적 같았다.
마당 한켠의 방울토마토가 소리 없이 자라듯 다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그렇게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길 바란다. 신파라도 할 수 없다. 진정 내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