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를 보고 와서
미술관에서 많은 작품을 보고 돌아온 날, 유난히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특히 스토리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천양지차다.
작품 외양이 주는 감동도 크지만, 작품의 숨은 결과 함께 감상하면 기억에 오래 저장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서울, 덕수궁, 과천에 이은 네 번째 미술관이다.
60년 동안 연초제조창으로 운영되다가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미술관으로 탈바꿈하였다. 볼만한 전시는 모두 서울이 독점하는 문화적 한계에 그나마 숨 길을 열어준 곳으로, 지역의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내게도 그냥 이유 없이도 들리는 아지트 중 하나이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모처럼 일요일, 구름이 잔뜩 끼어서 덥지 않은 날씨에 관성처럼 도서관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훅 발길을 돌려 미술관으로 갔다. 운 좋게 도슨트 설명을 들을 기회를 잡았다.
1층의 개방 수장고는 하도 많이 가서 거의 작품을 외울 정도였는데, 전시나 특별 보존을 위하여 작품은 없고 덜렁 작품명과 작가 그리고 비게 된 이유를 쓴 패널만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양가감정이 든다.
'대여'라는 문구는 와신상담의 기쁨과 응원을 부르고, '보존 처리'라는 문구는 안타까움과 기도를 수반한다.
어제 맘에 들어온 작품은 이수경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이런 장면이 나온다.
- 가마에서 갓 구워낸 작품을 꺼낸 작가가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자 그대로 내던져 버린다. 옆에서는 조수가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놀랍게도 그렇게 던져져서 파괴되는 작품의 비율이 70% 정도라고 한다. 그렇게 완벽하게 공을 들여도 마지막 낙점을 받는 것은 겨우 30%이다. 그 30% 안에서도 우열을 가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또 극소수이다.
대중은 그 극소수조차도 훅 지나치며 보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수경 작가는 그 버려진 것들을 작가들의 허락을 받고 가져와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의도를 가지고 뭔가를 만드려고 힘썼지만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도대로 하려면 그 조각들을 다시 깨서 작가의 구상대로 짜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범인이라면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가차 없이 그렇게 했겠지만, 작가는 결단코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작품을 구상할 때 '원형을 보존하자.'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이미 한 번의 상처를 가진 조각들한테 또다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딱 들어맞게, 깨고 갈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작가는 어떤 모양을 예상하고 제작하는 의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후부터는 직관적으로 저절로 흘러가는 방향대로 맞춰나갔다.
또 하나의 결정적 한 수는 순금으로 파편을 붙인 것이다.
이미 상처받은 도자기의 파편을 위로하고자 가장 비싼 순금을 사용하여 그 아픔을 달래고자 했다.
발음이 같은 금이라는 언어유희는 보너스도 누리고....
3층의 기획전시실에도 이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했다.
<번역된 도자기>라는 같은 이름의 시리얼 넘버가 매겨진 것인데 수장고 작품 1/100의 크기였다.
앙증맞은 주전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 청자여서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다.
무생물에도 저런 정성을 쏟는데 나는 그동안 마음의 파편들을 얼마나 어루만졌는가 반성했다.
아마 내 마음을 평면으로 쭉 펼쳐 놓고 관찰하면 여기저기 찢어지고 그냥 대충 얼게 붙은 곳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 넝마 조각들은 순금은 커녕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 있었다.
남의 말을 거슬림 없이 들을 수 있다는 이순(耳順)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치하고 있다. 큰 구멍들과 상처는 두려움으로 아예 접근도 못 하는 실정이다.
어떤 계기가 나한테도 상처 난 조각들을 어루만지고 붙이게 할까?
굳이 그것을 소환하여 재점화하는 것이 맞을까?
그저 남들이 말하는 '시간이 약이다.'에 의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