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천자 작태수(望天子 作太守)

일상의 고찰 9 : 더뷰티풀 백일장 투고기

by 게을러영

주말이면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탁현민의 더뷰티풀'인데 주말 아침 10시부터 두 시간 동안 이어진다.

일주일의 주요 뉴스를 정리하는 브리핑으로 시작하여 술을 주제로 한 얘기, 체력을 증진하기 위한 코너, 무엇이든 배우는 코너 등 다양한 구성 속에서 나의 원픽은 신동호 작가님의 <글쓰기>이다.

1회부터 쭉 들었고, 생방을 놓치면 자기 전에 들으며 내게 필요한 부분을 메모하곤 했다.

퇴직 후 글쓰기에 몰두하는 나에게 금과옥조의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써라. 나의 얘기를 써라.' 같은 조언은 이미 알았지만, '단점도 글에서는 장점이 된다.' 와 '글은 첫 시작이 중요하다.' 며 안나 카네리나의 첫 구절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하다.'은 글쓰기의 큰 지침이 되었다.

얼굴과 글 모두 진실함을 장착하셨기에, 작가님의 조언에는 편안함과 함께 절대적 신뢰가 갔다.


1주년 기념 백일장을 한다는 공고가 9월 후반기 방송에서 나왔고, <가을 산>과 <서초구의 낙엽>을 주제로 장르는 무관하게, A4용지 한 장 분량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서울에 거주하지 않는 나는 '서초구의 낙엽'은 제외하고 '가을 산'만 생각했다.

단풍, 가을, 중년, 낙엽, 결실, 풍요, 마무리...... 뻔한 한계의 단어들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몇 줄을 끄적이다 억지스러운 서술을 멈추고 그대로 접었다.

잠이 안 와 뒤척이던 어느날, 갑자기 휘리릭 소재가 떠올랐다.

한 달반 전쯤 <성범죄자 알림e> 서비스로 인해 오랫동안 이어진 나의 일상이 파괴된 그 사건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간단한 메모를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고 다음날 기상 후 바로 써 내려갔다. 평소 습관대로 이삼일의 퇴고를 거쳐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런 특이한 소재로 '가을 산'을 쓴 사람은 없을 거라는 나름의 기대가 발표일까지 설레게 했다.


드디어 방송이 시작되고, 너무나 훌륭한 시 두 편이 2, 3등에 뽑혀 낭송되었다. 1등이 소개되기 직전, 산문이라는 멘트에 내 마음도 가볍게 떨렸다.

그리고 나는 떨어졌다.

'혹시나'는 항상 '역시나'에 밀린 내 인생다운 결과였다.

130여 편의 작품이 투고되었고, 모두 너무 높은 수준에 연휴 내내 서너 번씩 읽으며 선정하느냐 힘들었다는 작가님의 말씀이 왜 그렇게 진실되게 들리든지...... 그 130편 안에 내 글이 있다는 위로를 가장 앞에 놓고 섭섭함을 삼켰다.


섭섭함 대신 물을 들이키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내 꿈이 현실로 들어맞는 순간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졌다. 그냥 희망이 아니라 새벽에 꾼 진짜 꿈이다.

이 나이에 아이를 낳는 꿈이라니? 너무나 이상하고, 너무나 선명하여 깨자마자 검색했더니, '새로운 시작과 긍정적 변화, 행운, 기회, 성취' 등 온갖 좋은 말이 다 쓰여 있었다.

그 기대와 희망이 개꿈을 뒤집어 쓴 나가리로 곤두박질치는 그 순간에 바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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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아차상은 한 명을 생각했는데 작품들이 너무 좋아서 세 명을 선정했다는 작가님의 말씀과 함께 뜬 그래픽에 떡하니 박혀 있는 내 이름과 제목!

더구나 작가님께서 "참 잘 쓴 글인데 1, 2, 3등을 못 드려서 죄송하다." 그 한마디의 칭찬이 크레센토(Crescendo)로, 스테레오(Stereo)로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 부분을 몇 번씩이나 돌려 보고 또 녹화하여 가족 대화방에 올리고, 지인들에게 보내며 나만의 세리머니로 자축했다.


평소 자주 소식을 전하는 대학 은사님께도 보냈더니, '망천자 작태수(望天子 作太守)'란 짧지만 울림이 큰 답을 보내주셨다. 직역은 '천자(天子)를 바라봤으나 태수(太守)가 된다.'로, '큰 목표를 위해 정진하면 작은 성과는 이룰 수 있다.'는 은유였다. 장원은 못했지만, 아차상을 수상한 제자에게 힘을 주는 칭찬이자 꾸준한 글쓰기에 대한 품격 있는 격려였다.


오늘 나는 두 마리 토끼 아니, 세 마리를 다 잡았다.

들어맞은 꿈, 꿰찬 태수 자리, 존경하는 작가님의 귀한 칭찬까지!

이만하면 한 달 동안 히죽거릴 충분한 이유가 생겼다.

그 비밀스런 이유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사족: 이 글은 연재되고 있는 '글도 어중간 그림도 어중간'의 29화 '새벽 단풍을 볼 수 있을까?'의 후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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