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하루의 끝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울린다. 아마 누구도 모르게 수십 번쯤 무너질 뻔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온 고요한 기록이 이 시간에 스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숨을 몰아쉬며 “여기까지 왔다”며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을 사람들. 그들은 이미 충분히 강했고, 이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이 하루를 견뎌냈다. 좌절과 희망, 그 사이 어딘가에서 하루를 살아낸 것 자체가 작은 기적과 다름없다는 걸, 나는 하루의 끝에서야 비로소 실감하곤 한다. 어쩌면 이 시간은 씩씩한 얼굴을 내려놓아도 되는, 유일하게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인지도 모른다.
하루가 저물어갈 때 방 안에 스며드는 공기는 묘하게 따뜻하면서도 묵직하다. 소파 위에 던져둔 겉옷, 식탁 가장자리에 간신히 걸쳐진 머그컵, 읽다가 멈춘 책에 끼워둔 얇은 종이 하나.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도 오늘의 체온을 품고 있는 듯하다. 이 어지럽혀진 풍경조차 나를 꾸짖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너, 잘하고 있어”라고 조용히 토닥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세상 앞에서는 단단한 표정을 붙였던 나도 이 시간만 되면 조금 느슨해지고, 숨소리가 조금은 푸근해진다. 스스로를 다독일 여유가 오직 이 순간에만 허락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하루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어깨에 걸린다. 누군가의 말 한 줄기가 바늘처럼 찔러와 마음 구석을 고스란히 긁어놓는 날도 있고, 별것 아닌 일인데도 괜히 기운이 빠져 소파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런 날, 하루의 끝은 마치 어둠 속에서 건네는 작은 손바닥 같다. 불을 끄고 창문을 살짝 열어두면 밤공기가 서늘하게 스며들며 오늘의 잔열을 천천히 냉각시킨다. 온종일 뜨겁게 뒤틀렸던 감정들이 천천히 가라앉고,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말 없는 슬픔들도 조용히 자리로 돌아간다. 그제야 “괜찮아, 오늘은 여기까지도 충분해”라는 문장이 마음 한가운데 고요히 내려앉는다.
하루의 끝은 누구보다 나 자신을 더 가까이 만나게 되는 시간이다. 낮 동안엔 숨기고 밀어두었던 마음이 이때가 되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괜찮은 척 웃었던 순간에 남아 있던 미세한 떨림, 억지로 삼켰던 말, 불편해서 외면했던 감정들이 작은 그림자처럼 마음 벽에 붙는다. 그 모든 것들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시간에만은 그 어떤 감정도 나를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솔직해질 기회가 허락되는 듯해 마음이 오히려 가벼워진다. 감정에게도 쉬어갈 틈이 필요한 것처럼 나에게도 이 정적은 필요하다.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의 하루라는 건 사실 누구에게도 가볍지 않다고. 밖에서는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던 사람도,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속에 작은 돌멩이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퇴근길에 무너질 듯 걸어가는 사람을 볼 때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 사람도 오늘을 버텼구나.” 이 생각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더 다정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루의 끝을 지나면서 내 일상뿐 아니라 타인의 하루까지도 슬며시 떠올린다. 그들도 나처럼 버티고 견디며 이 시간까지 도달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묘하게 선명해지는 장면들이 있다. 오늘 주고받았던 말, 누군가의 표정,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던 작은 감정들. 물속에서 떠오르는 조각처럼 이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좋은 기억은 부드러운 빛처럼 번지고, 아쉬운 순간들은 오래 만져보게 되는 작은 조약돌처럼 손끝에 머문다. 이 둘을 모두 품어야 하루라는 그림이 비로소 완성된다. 완벽한 하루란 없다. 다만 견딘 하루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하루가 우리를 조금 더 앞으로 밀어주는 힘이 된다.
하루의 끝은 ‘정리’이면서 동시에 ‘예고’다. 마무리하는 시간인 동시에 내일을 가능하게 하는 시작의 자리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고쳐 세우고, 내일을 위한 작은 숨을 고르는 시간. 오늘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내일은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바라보는 시간. 지금 이 고요가 있어야 내일이라는 바람도 버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하루의 끝이 찾아오면 꼭 스스로에게 작은 말 한마디를 건넨다. “수고했어. 오늘도 잘 살아냈어.” 그 말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다. 애써 버틴 시간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조금은 풀리고 가벼워진다.
사람들은 잠들기 전의 몇 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몇 분이 하루를 완성하는 진짜 핵심이다. 방금 전까지 뒤엉켜 있던 감정들이 차분히 정돈되는 시간. 내 속 이야기들이 조용히 흐르는 시간. 오직 나만 알고 있는 마음의 무늬가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이 시간에만 우리는 누구의 기대도, 누구의 기준도 아닌 ‘내 마음의 언어’로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 솔직하게, 천천히, 조용히.
오늘도 나는 이 시간에 작은 목록을 만들어본다. 감사한 것 하나, 놓아야 할 것 하나, 내일의 나에게 건네고 싶은 말 하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 오늘 마신 따뜻한 차 한 모금도 좋고, 우연히 들은 노래 한 구절도 좋다. 의외로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하루의 끝을 환하게 밝혀준다. 거대한 목표나 완벽한 성취보다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은 이런 작은 숨결들에 더 가까울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작은 기쁨들을 모아 조용히 가슴 주머니에 넣는다. 내일 다시 꺼내볼 수 있도록.
오늘을 버틴 사람들은 대단하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고단함이 있었을 테고, 작은 상처 하나쯤 가슴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이 밤까지 도달했다는 건 다시 내일을 살아낼 힘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의 끝에서 잔잔한 숨을 고르고, 서서히 자신을 회복시키며, 내일이라는 새 장면을 위한 준비를 한다.
이제 당신의 하루도 천천히 문을 닫고 있을 것이다.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해도 된다. 오늘 실수한 건 오늘에서 끝내면 된다. 오늘 자책했던 건 이 자리에서 내려놓아도 된다. 오늘 더 잘 버티지 못했다고 자책할 이유도 없다. 버티지 못한 게 아니라 버텼으니까. 그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하루의 끝에 서 있을 때마다 셀 수 없이 많은 마음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 단 하나만 확실하다. 오늘을 살아낸 나도, 오늘을 견딘 당신도, 이 밤과 함께 잠시 쉬어갈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 고요가 내일을 가능하게 하니까. 이 고요가 삶을 다시 일으키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루의 끝에 조용히 인사를 보낸다.
오늘을 버틴 나에게.
오늘을 견딘 당신에게.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게.
“수고했어. 잘 가. 내일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