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둔 온기의 자리
누군가는 나를 위해 자리를 오래 비워두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왜 이토록 무겁게 느껴졌는지, 나는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니면 그 빈자리에 누구도 앉을 수 없을 거라고, 너는 참 쉽게 말했지. 꼭 나여야 한다고, 내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 말은 그때 내게 달콤하면서도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만지면 베일 것 같은 호흡이 스며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누구의 소유도 되고 싶지 않았고, 누구의 전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말했지. 하지만 네 옆에 서 있었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네가 손을 뻗는 순간 나는 너에게 온전히 기댈 것 같다는 걸. 네게 기대는 순간 나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그래서 너에게 갈 수 없었다. 너를 밀어낸 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두려워서였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말 뒤엔 언제나 작은 떨림이 남는다. 널 선택할 만큼, 너를 위해 나를 내어줄 만큼,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워둔 자리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시간이 오래 머무르다 간 자국이 바닥에 잔흔처럼 남는다. 비워둔 자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공백을 가벼운 것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공백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 너는 내 앞에 하나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의자처럼 조용히 빛을 잃어가면서도, 그 자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를 바라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가까이 가면 무너질 것 같고, 멀어지면 나만 흔들릴 것 같아서. 한 번은 그 자리에 앉아볼까 잠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다. 하지만 단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대신 멈춰 서 버렸다. 내 발끝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금 모자란 곳에 머물렀다.
사람마다 사랑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이는 깊이 빠져도 잔잔하게 흘러가고, 어떤 이는 작은 물결에도 쉽게 흔들린다. 나는 후자였다. 조금의 온기에도 기대고 싶어지는 사람. 그리고 기대는 순간 다시 혼자가 될까 두려워 피하고 마는 사람. 그런 내가 누군가의 전부가 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에게 빠져들까 너무 두려워 도망치듯 돌아섰다. 감정이 무너지면 나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으니까. 사랑이 나를 구해줄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었기에 나는 뒤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그 선택만큼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배웠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조차 몰랐다. 그래서 더욱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은 용기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랑은 용기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사랑은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동시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수반한다. 그날의 나는 그 불안을 견딜 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해 너를 포기했다. 말은 쉽게 했지만 속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갔다. 하지만 네가 남겨놓은 그 빈자리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희미해질 뿐이다.
어쩌면 너는 그 자리에 앉아주길 원했을 것이다. 우리 둘만의 온기로 채워지길 바랐겠지. 나란히 앉아 서로의 그림자를 나누며 하루를 쌓아가는 모습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자리를 외면했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아닌 것 같아서. 내가 나를 붙잡기에도 벅찬 시기였기 때문이다. 상처는 오래전부터 내 안에 깔려 있었다. 나는 사랑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온기가 다가오면 기쁨보다 불안이 먼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불안이 네게 닿기 전에 나는 선을 그었다. 네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감정을 포장했지만, 사실은 내가 상처받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선명한 그림자만 남긴 채 멀어졌다.
나는 네가 남겨둔 자리에서 많은 걸 배웠다. 비워두는 것도 선택이고, 그 선택이 나를 지켜주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내가 그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사이의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다. 사랑은 채움으로 완성되기도 하지만, 비움으로 완성되기도 하니까. 비워둠은 포기가 아니라 인정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다 품을 수 없는 시기였다는 인정, 그때의 나로는 너를 버티기 어려웠다는 인정. 이 인정이 있었기에 나는 붕괴되지 않았다.
당신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지 않은가. 차마 채우지 못한 자리. 너무 좋아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흔들릴까 두려워 가까이하지 못했던 자리.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놓친 사랑은 아쉽지만 미련은 없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쉽고 미련 없다는 말속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이 숨어 있다. ‘그때 내가 조금 더 용감했더라면’이라는 미세한 후회, ‘그때의 나는 왜 그리 두려웠을까’라는 자책이 아주 가늘게 흔들린다. 나는 그 감정을 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마저도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한 조각이라는 걸 이제는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깊어진다.
비워진 자리라고 해서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닿지 못한 말, 전하지 못한 마음, 차마 털어놓지 못한 두려움이 조용히 앉아 있다. 그 자리는 오래도록 무언가를 기다리며 숨을 쉬는 공간이다. 나는 그 자리를 외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기엔 겁이 났고, 멀어지기엔 아쉬웠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우리 사이의 빈자리도 완전한 공백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가 닿지 못한 마음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풍경이었다. 사랑이 깊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아름다웠던, 그 시절만의 풍경.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네가 말한 “꼭 너여야 한다"는 말이 소유의 언어가 아니라 간절함의 모습이었다는 걸. 그 말은 나를 가두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바람이었다는 걸. 그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늘 무언가에 얽매일까 두려워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네가 나를 붙들던 손길이 사실은 사랑의 모양이었다는 것을. 단지 그 사랑의 속도가 나와 맞지 않았던 것뿐이다.
내가 그 자리에 끝내 앉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워둔 자리는 때로 채워진 자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비웠고,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아프게 바라보지 않는다. 과거의 감정이 눅눅하게 눕는 평상처럼, 그 자리도 이제는 편안한 그늘 하나가 되었다. 추억이 앉아 쉬어가는 곳.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남는 온기가 가만히 눕는 곳.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자리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예전처럼 겁먹고 서둘러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가 꼭 나여야 한다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스스로 앉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천천히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잃지 않고도 누군가 곁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으니까.
비워둔 자리도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채우지 않은 자리였지만, 그 자리 덕분에 나는 나를 잃지 않았다. 네가 만들어 준 자리는 나를 흔들었고, 나는 그 흔들림 속에서 나를 배우고 다시 일어섰다. 그러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비워둔 자리도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고. 당신이 만들어준 그 빈자리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