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에 먼저 다녀간 얼굴

손끝이 닿기 직전의 순간

by Helia

새벽 공기가 이마에 스치며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려올 때, 나는 먼저 내가 벗어 나온 세계가 너무도 유연했다는 사실만을 감지했다. 말랑한 어둠에 뿌옇게 개어 있던 그 세계는, 마치 젤리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며 사라지는 느낌을 남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흐트러지는 꿈의 모서리 한 곳에 다른 빛깔이 남아 있었다. ‘이영자.’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그것이었다. 특별한 애정도, 특별한 반감도 없는 사람. 그저 익숙한 TV 속 존재였던 그녀가, 내 무의식 속에서는 은근한 기척으로 나타나 있었다. 왜 하필 그녀였을까. 그 의문은 꿈보다 더 오래 남은 잔향처럼 내 가슴팍에 머물렀다.

꿈속의 공간은 현실과 완전히 달랐다. 나를 둘러싼 것은 색이 아니라 감각이었고, 빛이 아니라 온도에 가까웠다. 형태가 있는 듯 없는 듯, 무중력의 방처럼 조용한 공간 한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멀리서 흐릿한 윤곽이 흔들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그것이 물결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곧 둥글고 친근한 얼굴선이 나타나며 한 사람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얼굴은 이영자였다. 현실에서 보던 익숙한 웃음기를 머금고는 있었지만, 꿈속에서는 조금 다르게 빛났다. 마치 누군가가 흰 종이 위에 따뜻한 색으로 덧칠해 둔 초상 같았다. 알아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좋아하는 연예인도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등장엔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내 마음속 먼지가 하나 털리는 듯한 가벼움이 일었다.

그녀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성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입술의 모양만 흐릿하게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먼 유리창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들리지 않아도 전달되는 말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그녀의 표정에는 나무 그늘처럼 부드러운 것과 태양빛처럼 쨍한 것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연예인이 꿈에 나오면 행운이라느니, 복권이라도 사보라는 말. 특히 악수나 포옹을 하면 재물이 붙는다느니 하는 속설들. ‘악수를 했나?’ 머릿속에서 이 질문이 스치자 마치 호출음처럼 공간의 공기가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맞잡았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한순간 그녀가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는 잔상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선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 흐릿함이 답답해 손을 뻗어 보려 했으나 꿈은 항상 그렇듯, 내가 움직이려는 순간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법이었다. 손끝이 닿았던 것 같기도, 전혀 닿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한 모호함만 남겨둔 채.

그런데 바로 그때, 꿈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내게 펼쳐 보였다. 그녀의 뒤편에서 빛줄기 하나가 길게 늘어지며 무언가 형체를 잡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그림자인 줄 알았지만, 곧 그것이 누군가의 실루엣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실루엣은 마치 오래전 누군가를 떠올릴 때 생기는 뒷모습처럼 흐릿하고, 순간순간 잘려나가는 영상처럼 불완전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어쩌면 내가 바랐던 ‘최애’가 그 빛줄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그 존재는 이영자보다 키가 조금 더 크고, 기운이 조금 더 가벼웠다. 그리고 손을 들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 이영자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오며 그 장면을 가려버렸다. 마치 "오늘은 내 차례야"라고 말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배경의 실루엣은 곧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아쉬움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잔잔함을 느꼈다. 떠오르려던 얼굴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는 내게 손을 흔들고 갔다는 느낌을 남기고 있었다.

꿈이라는 건 원래 이런 것인가 보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듯, 잠깐의 움직임만 남겨두고 사라지는 존재들. 내가 원했다고 해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원치 않았다고 해서 비켜가는 것도 아니다. 그 흐름 속에서 이영자는 유독 분명한 얼굴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명백하게 손을 내미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맞잡았는지 기억나는 건 오히려 그 순간의 온도가 아니라, 그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어딘가에서 나를 격려하는 듯한, 말 대신 건네는 응원의 눈빛.

나는 그 눈빛에 이끌려 다시 손을 뻗었지만, 손끝이 닿기 직전 공간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꿈의 표면이 깨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빛이 흐트러지고 색이 뒤섞이며 모든 장면이 먼지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꿈의 문을 붙잡으려 했지만 문은 이미 반쯤 닫히고 있었다. 다시 이어서 꾸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해 오히려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듯했다. 꿈은 이런 식으로 야박하다. 붙잡으려 하면 미끄러지고, 바라보면 멀어지고, 잊으려 하면 오히려 또렷해진다. 눈을 떴을 때는 손바닥이 텅 빈 듯 허전했다. 꿈속 누군가의 손을 놓친 기분이었다.

아침 공기는 차갑고 또렷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꿈에서 빠져나온 잔상이 목 뒤쪽에서 얼음처럼 녹고 있었다. 나는 베개 위에 남아 있는 기운을 더듬듯 잠시 멍하니 누워 있었다. 왜 하필 이영자였을까. 이왕이라면 최애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불평이 스치면서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마치 내 무의식이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최애는 너무 귀해서 쉽게 꺼내 쓰지 못하는 귀한 보석 같고, 대신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는 따뜻한 얼굴이 먼저 꿈에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무언가 좋은 운이 문밖에 와 있는데, 가장 먼저 뛰어나온 안내자가 그녀였던 것인지도.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손을 맞잡았는지조차 확실치 않은데도 괜히 기대가 생겼다. 어쩌면 손끝 대신 마음이 먼저 닿은 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악수의 유무가 아니라, 그 꿈이 아침까지 나를 흔들어 깨웠다는 사실이었다. 사소한 꿈은 눈뜨자마자 사라지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는 꿈은 반드시 뭔가를 밀어 올린다. 마음속 한 곳을 톡 건드리며 방향을 바꾸는 기묘한 바람처럼.

그 후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최애가 등장하길 바랐다는 솔직한 욕망도, 왜 하필 이영자였나 하는 의문도, 꿈이 주고 간 온기를 오래 붙잡으려는 마음도. 그러다 문득 이런 결론이 떠올랐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건 누가 꿈에 나왔는지가 아니라, 그 꿈이 나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라는 것. 깨어 있는 하루가 잠든 시간의 잔물결에 의해 바뀌는 경험. 그건 손을 잡았는지 아닌지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진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꿈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가 지어 보이던 미소는 유난히 넉넉했고, 그 미소는 내 하루의 첫 장면을 밝히는 창문처럼 부드럽게 빛났다. 최애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꿈에서 사라진 손끝의 온도 대신, 남아 있는 건 한 사람의 미소가 스쳐간 공기 같았다. 나는 그 여운을 가슴에 넣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행운이라는 건 어쩌면 이렇게 조용히, 문틈 사이로 먼저 다녀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오늘 하루가 조금 가벼운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잡지 못한 그 손이 아니라, 꿈속에서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그 따뜻한 얼굴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