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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꿈 단편집

펭수를 만난 밤

낯선 세계의 발자국

by Helia

어젯밤, 나는 영화 한 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물론 현실이 아니라 꿈속에서의 일이었지만, 그 체감은 현실보다 더 날카로웠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늦은 시간에 보고 잠들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 세계 장르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 세계가 한밤중 내 꿈속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이야기는 영화와 전혀 달랐으나, 공간의 낯섦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마치 영화의 그림자가 내 무의식 깊은 곳을 건드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처럼.

꿈은 시작부터 불길한 속도로 나를 끌고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롤러코스터 위였다. 탑승한 기억도 없었다. 바람이 광기처럼 휘몰아쳤고, 트랙은 사정없이 굽이쳤다. 기계가 압축한 속도가 몸을 잡아 흔들었다.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스산해졌다. 그러다 철로가 한순간 툭 끊어졌다. 바퀴가 허공에서 비명을 지르며 날카롭게 떨렸고, 내 몸은 그대로 공기 속으로 던져졌다. 바닥이 끝없이 멀어지더니, 온몸이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졌다. 꿈에서는 죽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심장이 빠르게 수축하고, 숨이 목에 걸려 끊어질 듯한 극한의 공포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충돌의 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 눈앞에서 세계가 깜박 꺼지듯 어둠 속으로 사라지더니, 어느새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영화 속 어느 장면도 아닌, 오히려 내가 상상하지 못한 기묘한 세계였다. 하늘은 보랏빛과 회색이 번져 겹겹으로 물들어 있었고, 땅은 종이를 잘게 찢어 붙인 듯한 질감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살짝 흔들리는 느낌. 마치 바닥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린 그림 위를 걸어가는 듯했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몇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서로 모르는 얼굴, 각기 다른 공포와 혼란을 품은 표정들. 누군가는 이 세계를 탐색하듯 주위를 둘러보았고, 다른 이는 울먹이며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누군가는 이 기묘한 상황을 흥미롭다며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반응은 잠시뿐이었다. 그들은 한 명씩, 마치 투명한 손이 끌어당기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소리도,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현실의 삭제 기능이 꿈속에서 작동한 듯, 그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결국 남겨진 건 나 하나였다.

홀로 남은 순간, 세계는 갑자기 깊은 정적을 품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이 있었다. 땅 위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사람의 발은 아니었다. 네 발 짐승이 남긴 흔적이었고, 그 형태는 곰과 비슷하면서도 더 날렵했다. 더 크고, 더 깊었으며, 더 directional 했다. 마치 “여길 따라와”라고 말하듯, 발자국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선택지가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상 없었다. 이 세계가 나에게 제시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주저하며 그 흔적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걸을수록 입 안이 말라붙는 듯 갈증이 심해졌다. 꿈속에서는 수분조차 현실과 다르게 증발하는 것 같았다. 무심코 ‘시원한 음료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중얼거렸는데, 그 순간 내 앞에 작은 바람이 회오리처럼 모이더니 ‘짜잔’ 하고 컵 하나가 나타났다. 놀라움에 숨이 멎을 뻔했다. 이 세계는 내 생각을 읽고 구현하는 기묘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딸기라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또 한 번, 분홍빛으로 물든 음료가 손에 들어왔다. 거품까지 정교하게 살아 있었다.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라면 설명할 길 없는 마법 같은 규칙.

딸기라테의 달콤한 향이 목을 적시자, 다시 발자국을 따라 나아갈 용기가 조금 생겼다. 그러나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고, 눈처럼 가벼운 얼음 알갱이가 바람에 실려 얼굴을 스쳤다. 언덕을 두세 번 넘은 뒤, 마침내 하얗게 빛나는 구조물이 시야에 걸렸다. 이글루 같았다. 작은 얼음집 하나가 텅 빈 공간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외로워 보이고, 동시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건 내가 예상하지 못한 존재였다.
펭수.
그러나 TV 속 펭수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생명체로써의 펭수였다. 깃털은 바람에 따라 섬세하게 흔들렸고, 눈동자는 화면보다 몇 배는 더 깊은 생기를 띠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사람이 들어간 탈이지만, 꿈속에서는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진짜 펭수’였다.

나는 당황한 채 말했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펭수는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여긴 원래 내 집이야.”

그 말투와 태연함이 묘하게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경계를 흔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캐릭터가 캐릭터가 아니라, 본래부터 그렇게 살아온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펭수의 움직임, 목소리, 기척 모두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 존재감은 현실의 어떤 배우도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였다.
펭수가 나를 이글루 안으로 부르려 손짓했다. 그 안에는 얼음벽 사이로 은은한 빛이 흘렀고, 어딘가 아늑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따뜻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바닥이 비누처럼 녹아내리더니 뒤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시야는 흔들리고, 펭수가 멀어졌으며, 그의 부리가 마지막 인사처럼 어렴풋이 흔들렸다. “또 놀러 와—”라는 말과 함께 소리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다시 눈을 뜨자 현실의 천장이 보였다.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고, 온기가 감돌았다. 꿈은 끝났지만 꿈에서 살아 움직이던 모든 감각이 오래 남았다. 추락의 공포, 딸기라테의 달콤함,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 그리고 ‘진짜 펭수’의 눈빛까지. 현실과 꿈의 경계가 잠시 뒤바뀐 듯한 여운이 이어졌다.

이 세계 장르를 좋아하지 않은 나지만, 그 꿈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생생했다. 꿈속 세계는 낯설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발자국은 나를 이끌었고, 세계는 내 생각을 들어주었고, 펭수는 그 세계의 주인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 세계는 왜 나를 불렀을까?
펭수는 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 이글루는 정말 그의 집이었을까?

꿈은 끝났지만, 아직 문이 닫힌 것 같지 않다.
아마 다음 꿈에서, 저 멀리 얼음 위로 펭수가 다시 걸어 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 세계로 발을 들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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