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장|흘러가다

붙잡지 않기로 한 날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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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š Janáček – On an Overgrown Path, Series I: No. 7, “Good Night!”

마음이 더러워졌다고 느낀 날은 대개, 아무 일도 없던 날이다. 특별히 상처받을 일도, 울 이유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숨이 탁해지고 생각이 무거워진다. 괜히 지나간 말 하나를 되짚고, 이미 끝난 장면을 다시 불러낸다.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탁해진다. 마치 맑던 물에 손을 집어넣고 휘젓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 나는 안다. 아, 지금 나는 흐름을 거스르고 있구나.

흘러가게 두자. 붙잡지 말고, 붙들려하지도 말고. 마음속에 고여 있던 것들은 대부분 내 것이 아니다. 타인의 기대, 무심히 던진 말, 해석할 필요 없던 시선들이 어느새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쌓여 있다. 그것들은 머물 자격이 없다. 물은 흐를 때 맑아지고, 감정도 흘러갈 때 제자리를 찾는다. 씻어내야 할 것은 기억이 아니라 집착이다.

나는 오래 붙잡고 있었다. 이미 끝난 관계의 뒷모습을, 닫힌 문 앞의 침묵을, 다시는 오지 않을 대답을. 흘려보내면 내가 지는 것 같았고, 놓아버리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속에 돌을 하나씩 얹었다. 무게는 늘어났고, 숨은 짧아졌다. 그제야 알았다. 사라지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흘러간다는 말은 체념처럼 들리지만, 실은 선택이다.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는 결정, 설명하지 않겠다는 태도, 증명하지 않겠다는 용기.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을 변호하느라 지친다.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고르고,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마음을 닳게 한다. 하지만 모든 감정이 해명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모든 진실이 이해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강물은 목적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낮은 곳을 향해 흐를 뿐이다.

기억은 붙들수록 날카로워진다. 자꾸 만지작거리면 모서리가 살아난다. 반면, 흘러가게 둔 기억은 닳는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더 이상 피를 내지 않는다. 상처는 잊힐 때보다 닳아 없어질 때 비로소 무해해진다. 그래서 나는 기억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흐르게 둔다. 물에 맡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연이 같은 속도로 흐르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급류를 타고, 누군가는 잔잔한 물길을 고른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어도 도착지는 다르다. 떠나는 사람에게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다. 남는 사람이 자신을 탓하지 않기로도 했다. 흘러감은 배신이 아니라 자연이다. 붙잡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고, 떠났다고 해서 모두 틀린 것도 아니다.

마음이 가장 더러워지는 순간은 흐름을 거스르려 할 때다. 이미 끝난 말을 다시 씻고, 지나간 계절에 옷을 맞춰 입히고, 닫힌 문을 손톱으로 긁는다. 그럴수록 마음은 흙탕물이 된다. 시야는 흐려지고, 발목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감긴다. 반대로, 흘러가게 두면 의외로 빨리 맑아진다. 처음엔 불안하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으면 공허해질 것 같아서.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된다. 비워진 자리에 숨이 들어온다는 걸.

흘러가다 보면 비워진다. 비워지면 들린다. 내 숨소리, 걸음의 속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것과 원한다고 착각했던 것의 차이. 흐름은 나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만 남긴다. 나를 살게 하는 것과 나를 설명하게 만드는 것. 그 둘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전자는 품고, 후자는 흘려보내면 된다.

세상은 늘 속도를 요구한다. 멈추지 말라고, 뒤처지지 말라고, 끊임없이 증명하라고. 하지만 흐른다는 것은 달린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옆으로, 때로는 잠시 고여 하늘을 비추는 것도 흐름이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더 낮은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 방향만 잃지 않으면 된다.

상처를 씻는 데에는 말보다 물이 낫다. 말은 종종 상처를 다시 벌리고, 물은 아무 말 없이 지나가며 닦아낸다. 그래서 오늘은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증명하지 않기로 했다. 붙잡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더럽혀졌다고 느낄수록, 더 세게 씻으려 들지 않고 더 오래 흐르게 두기로 했다. 시간보다 흐름을 믿기로 했다.

결국 남는 것은 흘러온 흔적이다. 닳아 둥글어진 돌, 낮아진 강둑, 한결 가벼워진 몸. 그리고 알게 된다. 내가 지키려 애쓰던 것들보다, 흘려보낸 것들이 나를 더 잘 지켜주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제는 안다.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것을. 그냥 흘러가게 두자. 그래야 마음이 씻긴다. 그래야 내일이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