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대기에서 멈춘 시간
꿈을 꾸었다. 티 익스프레스를 탔다. 그리고 꼭대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기울어야 할 그 순간에 열차는 수직으로 멈춰 섰고,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포 속에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추락을 예상하고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은 몰랐다.
장소는 잠실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곳, 수많은 기억이 겹쳐 있는 공간. 어릴 적 웃음소리와 어른의 피로가 같은 바닥을 밟고 다니는 도시 한가운데서 나는 롯데월드로 들어갔다. 꿈속의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티 익스프레스 앞에 섰을 때조차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현실이라면 몇 번쯤 뒤돌아섰을 텐데, 그날의 나는 선택을 이미 끝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줄을 섰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 더 미룰 수 없다는 체념에 가까운 마음으로.
좌석에 앉자 안전바가 내려왔다. 딸깍, 하고 고정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보호의 신호이자 동시에 봉인의 소리였다. 이제 움직일 수 없다는 확인. 열차는 조용히 출발했다.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고, 올라가는 동안 바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이 그랬던 것처럼 무난했다. 어느새 나는 꽤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었고, 그 사실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곧 떨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롤러코스터가 그러하듯, 정상은 짧고 잔인한 정적을 품고 있다. 숨을 참고, 손에 힘을 주고, 마음속으로 준비하는 순간. 그런데 그다음 장면이 오지 않았다. 열차는 앞으로 쏟아지지 않았고, 뒤로도 물러서지 않았다. 딱 그 자리에서, 정확히 수직으로 멈춰 섰다. 중력도 방향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마저 고장 난 듯,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바닥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위를 올려다봐도 더 갈 길은 없었다. 이미 오를 만큼 올랐고, 이제는 내려가야 하는데, 세상은 조용했다. 비명도, 급강하도, 스릴도 없이 그저 정지된 상태.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차라리 떨어졌다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텐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로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깊이 불안하게 했다.
안전바는 단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전함이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완전히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보호받고 있다는 감각이 위로가 아니라 족쇄처럼 느껴졌다. 움직일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상태.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고정된 시간 속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꿈속의 나는 소리를 지르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다만 속으로 계속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왜 지금 멈췄지. 왜 여기서.
잠실이라는 공간이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오히려 오래 머무르게 되는 곳, 익숙함 때문에 새로운 선택을 미루게 되는 장소. 티 익스프레스는 그 안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선택이다. 누가 시켜서 탄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골랐다. 스스로 줄을 서고, 안전바를 내리고, 출발을 허락했다. 그런데 그 선택의 끝이 실패도, 추락도 아닌 정지라는 점이 이 꿈을 단순한 악몽으로 두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요즘의 나는 딱 그 꼭대기에 서 있다. 어느 정도는 올라왔고, 준비도 마쳤고, 외부에서 보기엔 안전해 보인다. 더 이상 무모하다고 할 수는 없는 지점. 그런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실패가 두려운 것도 아니고, 아예 포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이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어디로 떨어질지, 혹은 정말 떨어져도 되는지 확신이 없어서 몸이 먼저 멈춰 버린 상태다.
꿈속의 열차는 말이 없었다. 대신 조용히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온 건 맞느냐고. 이 높이가 네가 원하던 자리였느냐고. 아니면 오르느라 바빠서, 정작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잊어버린 건 아니냐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직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라오는 데에는 분명 힘이 들었지만, 내려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 꿈은 추락의 공포가 아니라, 보류된 시간의 공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로 버티는 시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안전해 보이지만, 그 안전함 속에서 조금씩 닳아가는 마음. 우리는 종종 떨어지는 걸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진짜 두려운 건 계속 이 상태로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선택이 결국 가장 큰 소모가 된다는 사실을, 꿈은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래도 분명한 건 하나다. 나는 이미 출발했다는 사실. 오르지 않았다면 멈출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안전바가 있다는 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꼭대기에 있다는 건 여기까지 올 힘이 있었다는 증거다. 꿈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상태를 보여준다. 지금의 나를, 가장 솔직한 각도로 세워 놓는다.
눈을 뜨고 나서도 그 장면은 오래 남았다. 수직으로 멈춘 열차, 숨을 참고 있는 몸,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는 시간. 아마 이 꿈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현실에서 내가 그다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움직일 때, 그때서야 이 꿈은 완성될 것이다. 떨어지든, 천천히 내려오든, 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빠져나오든. 다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정말 무서운 건 떨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로 버티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