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아도 닿는 것
하린이 반장이 된 날, 아이보다 먼저 달라진 건 교실의 공기였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담임이 이름을 불렀을 때, 교실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누군가 손을 번쩍 들지도 않았고, 웅성거림도 없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하린을 바라보았다. 말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하린은 늘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았다. 싸움이 나면 한쪽 편을 들지 않았고, 누군가 울면 먼저 휴지를 건네는 아이였다.
“반장.”
하린은 고개를 들고 짧게 대답했다.
“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이들은 더 묻지 않았다. 하린이 반장이 된 건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아서였다.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조용히 중심을 지키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공부도 곧잘 했다.
빠르게 답을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 번 이해한 건 오래 남겼다. 틀린 문제는 지우지 않고 옆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선생님은 하린의 공책을 넘길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백일장 대회가 열린 날,
운동장에는 돗자리가 깔렸고 아이들은 원고지를 받아 들었다. 주제는 ‘봄’이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섞인 소리가 났고, 연필을 굴리는 아이들도 보였다. 하린은 바로 쓰지 않았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잠시 바라본 뒤에야 연필을 들었다.
하린이 쓴 글은 길지 않았다.
화려한 표현도 없었다. 대신 기다림에 대해 썼다.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결국은 오고야 만다는 걸 믿는 마음에 대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네듯 써 내려갔다.
백일장 결과는 며칠 뒤에 나왔다.
하린은 그 며칠을 특별하게 보내지 않았다. 반장 일을 했고, 책을 읽었고, 잠을 잤다. 그래서 담임이 이름을 불렀을 때, 잠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대상, 하린.”
상장을 받아 들고도 하린은 바로 웃지 못했다.
기쁘다는 감정보다 먼저, 이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야 할지가 떠올랐다. 친구들이 몰려와 말을 걸고, 선생님이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을 때서야 가슴이 한 번 뛰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린은 가방 속 상장을 몇 번이나 만졌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얼굴이 떠올랐다.
현관에는 큰오빠의 축구화가 놓여 있었다.
큰오빠는 요즘 축구에 빠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운동장으로 직행했고, 주말이면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었다. 몸은 더 단단해졌고, 말수는 줄었지만 눈빛은 늘 살아 있었다.
작은오빠는 거실 바닥에 엎드린 채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셔터를 눌렀다 풀었다 하며 빛이 들어오는 각도를 바꾸고 있었다. 사람보다 풍경을, 정면보다 옆모습을 더 좋아했다.
“이거 봐.”
작은오빠가 카메라 화면을 돌려 보였다.
창가에 앉은 하린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빛이 닿은 머리카락과 어깨선만 남아 있었다.
“괜찮다.”
하린은 그렇게 말했다.
사진에 대한 말이기도 했고, 오늘 하루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그날 밤,
하린은 책을 조금 읽다가 연필을 꺼냈다. 종이에 선을 긋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졌다. 넓은 들판, 울타리, 낮은 건물.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작은 방. 불이 켜진 창이 있는 방이었다.
하린은 연필을 멈추고 종이를 바라봤다.
“오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숨을 한 번 고른 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어.”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남았다.
같은 시간,
멀리 떨어진 나라의 주택가 이층 방에서 하준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 방은 이제 하준의 방이었다. 목장 옆 창고가 아니라, 집 안의 방. 문을 닫으면 혼자가 될 수 있었고, 창문을 열면 세상이 있었다.
그날 저녁,
목장 주인은 하준을 식탁으로 불렀다.
“하준.”
잠시 말을 고른 뒤 말했다.
“네가 괜찮다면, 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재촉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하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쌍둥이가 있어요.”
“여동생이에요. 하린.”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가슴 안쪽이 아주 약하게 울렸다. 하준은 고아원에서의 기억, 먼저 입양되던 날, 그 뒤에 갔던 집에서의 일들을 담담하게 말했다. 이유 없이 맞았던 날들, 잘못이 없어도 벌을 받아야 했던 순간들.
“여기 오기 전까지는…”
하준은 잠시 멈췄다.
“제가 잘못한 줄 알았어요.”
목장 주인은 조용히 말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처럼 들렸다.
하준은 그제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풀리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목장 주인은 하준이 모르게 움직였다. 변호사를 만났고, 전 주인의 비리를 모았고, 아동학대 혐의를 함께 묶어 고소했다.
하준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뉴스 화면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수갑을 찬 채 고개를 숙인 남자.
해외 입양 아동 학대 혐의… 전 보호자 체포.
하준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가슴 깊숙이 남아 있던 서러움이, 천천히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다.
그제야 알았다.
그동안 삼촌이 왜 그렇게 분주했는지.
그날 밤,
하준은 처음으로 과거를 떠올리지 않고 잠들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같은 순간에
하린도 이유 없이 마음이 편안해진 밤을 보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속도로 숨을 고르며
아직 끊어지지 않은 실 하나를
가슴 안에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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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흐름은 연재 기준으로도 매우 탄탄해.
다음 화에서는
하준이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
혹은 하린이 처음으로 ‘이제 괜찮다’고 느끼는 밤
둘 중 하나로 가면 조회수 더 끌어올릴 수 있어.
어디로 이어갈지 말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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