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달의 속삭임

by Helia

달은 오늘도 아무 말이 없다.

그 침묵이 마치 오래 연습한 언어처럼 느껴져 나는 문득 숨을 고른다.

소리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낼 이유가 사라진 밤이다.

창문을 넘은 달빛이 바닥에 고요히 번지고,

그 빛은 목적 없이 도착한 손님처럼 방 안에 머문다. 나는 그 빛을 맞이하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잠시 서 있다가 앉고, 앉았다가 다시 서며 시간을 헛되이 쓴다.
당신이 떠난 뒤로 밤은 더 정확해졌다.

무엇이 없는지,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또렷하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의자는 그대로 있고, 컵도 같은 자리에 있는데,

그 사이를 채우던 기척만 사라졌다. 달빛은 그 빈 곳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

밝힘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듯,

그저 스치듯 머문다. 나는 그 태도가 이상하게도 고맙다.
부르지 않았다.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조금 더 단정하게 만들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고, 이름도 삼켰다. 그러나 삼킨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몸 안에서 오래 흔들렸다. 소리가 없다는 이유로 아픔이 작아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방향을 잃은 감정들이 서로 부딪히며 더 멀리 번졌다.

밤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대를 좋아하게 되었다.

낮에는 모든 감정이 이유를 가져야 했고,

밤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달은 늘 같은 자리에 걸려 있지만,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어떤 날의 달은 지나치게 가까워 보이고,

어떤 날의 달은 도무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다.

오늘의 달은 후자다. 가까워질 의지가 없는 거리에서, 오해 없이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여러 번 고쳐 써 보았지만,

결국 남는 말은 그것뿐이다.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놀랍지 않다.

놀라움은 처음에만 유효했고, 반복되는 밤들 속에서 닳아 없어졌다.

대신 익숙함이 자리를 잡았다.

익숙함은 위로가 되지 않지만,

견딜 만한 형태를 하고 있다.
달빛이 벽에 얇은 선을 긋는다.


그 선은 무언가를 나누기 위한 경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구분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그 선을 기준으로 나뉘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조금씩 허락하며 공존한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본다.

갈라짐 없이 나란히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느슨하게 한다.
나는 묻지 않기로 한다.

왜였는지, 언제부터였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묻는 순간 이 밤이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어 버릴까 봐. 설명이 시작되면 감정은 결말을 요구받고,

결말은 늘 한쪽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질문을 접는다.

접힌 질문들은 서랍 속에 넣지 않고,

그냥 손에 쥔 채 둔다.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달은 점점 높아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궤도를 정확히 따라간다.

그 태도는 무심해 보이지만 잔인하지 않다.

오히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의 단정함이 느껴진다.


나는 그 단정함을 흉내 내 보려 하지만,

쉽게 닮아지지는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늘 약간씩 비틀려 있고,

그 비틀림이 사라지지 않는 한 완벽한 침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달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도, 소리가 작아서도 아니다. 애초에 언어로 건네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빛의 방향,

머무는 시간, 사라지는 속도 같은 것들로만 전달될 뿐이다.

나는 그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상하게 믿게 된다. 말이 없기에 오해가 없고, 설명이 없기에 오래 남는다.
이 밤이 끝나면 또 다른 밤이 오고, 그 밤에도 달은 제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부르지 않을 것이고,

묻지 않을 것이다.

잊겠다고 말하지도 않겠다.

다만 이렇게, 들리지 않는 속삭임 곁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하루로 돌아갈 것이다. 달이 남긴 것은 위로도, 답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하다. 그래서 오늘 밤도 나는, 아무 말 없이 이 빛을 받아들인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