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덜어낼수록 빛난다
추천 클래식
Charles Koechlin – Les Heures persanes, Op.65: No.16 «Clair de lune sur les terrasses»
사실 낭만은 기억력이 좋은 사람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다. 너무 많이, 너무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과거를 미화할 틈이 없고, 미화되지 않은 시간은 좀처럼 낭만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의심한다. 우리가 말하는 낭만이란, 정말 그 시절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억이 적당히 빠져나가 주었기 때문일까.
나는 오래 전의 하루를 떠올릴 때마다 중요한 것부터 빠져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다. 그날이 몇 시였는지, 무슨 말을 먼저 꺼냈는지, 누가 먼저 집에 가자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남아 있는 것은 그날의 공기다. 낮과 밤의 경계쯤에서 서늘하게 식어가던 온도,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코끝을 스치던 냄새, 별 의미 없이 웃던 얼굴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또렷하다. 그리고 그 ‘아무 일 없음’이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는 하나의 사건처럼 반짝인다. 망각이 없었다면, 그런 장면은 끝내 낭만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기억할 용기는 없다. 너무 선명한 기억은 감정을 소모시키고, 사람을 과거에 묶어 둔다. 그래서 망각은 배신이 아니라 방패에 가깝다. 기억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각을 깎고, 모서리를 흐린다. 상처가 되었던 말은 음성만 남고, 표정은 사라진다. 갈등의 맥락은 흩어지고, 그 자리에 분위기만 남는다. 그렇게 살아남은 기억은 사실과는 다르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래 버틴다. 낭만은 바로 그 변형된 기억의 부산물이다.
사람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이미 멀어진 사람의 얼굴은 점점 단순해진다. 눈매는 희미해지고, 말버릇은 사라지며, 특정한 순간의 눈빛 하나만 남는다. 그 눈빛은 실제보다 더 많은 의미를 품고, 실제보다 더 오래 머문다. 그 사람과 나눴던 피로와 오해는 망각의 그늘로 밀려나고,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만이 중심에 남는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감정의 상당 부분은 망각이 정리해 준 결과물이다.
낭만은 늘 과거형이다. 현재에는 낭만이 살기 어렵다. 지금의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 속에 있고, 너무 빠른 반응을 요구받는다. 책임과 일정,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겹겹이 쌓여 낭만이 숨 쉴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때가 좋았다고 말한다. 사실 좋았던 것이 아니라, 덜 기억하게 되었을 뿐인데도. 기억이 선별되고, 불필요한 장면이 빠져나간 뒤에야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망각을 무작정 찬양할 수는 없다. 잊는다는 것은 때로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실수, 분명히 기억해야 할 약속까지 함께 흐려질 수 있다. 그래서 낭만과 망각 사이에는 늘 긴장이 존재한다. 어느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도 삶은 균형을 잃는다. 지나친 낭만은 현실을 왜곡하고, 과도한 망각은 책임을 지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사이, 전부도 아니고 전무도 아닌 애매한 중간 지대다.
나는 그 중간을 신뢰하게 되었다. 완전히 잊지도, 전부 기억하지도 않는 상태. 어떤 장면은 흐릿하게 남겨두고, 어떤 감정은 의도적으로 또렷하게 붙잡아 두는 선택의 영역. 그곳에서는 후회가 과장되지 않고, 그리움도 미화되지 않는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로, 느꼈던 감정은 느꼈던 감정으로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낭만은 그 위에 얇은 막처럼 덮이고, 망각은 바닥을 단단하게 다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기억을 관리하는 법을 배운다. 애써 붙잡지 않고, 억지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떠오르면 잠시 바라보고, 흐려지면 그대로 두는 것. 그렇게 남은 기억들은 이상하게도 가장 나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를 과거에 묶어 두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떼어내지도 않는다. 낭만은 나를 속이지 않고, 망각은 나를 비우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조금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낭만과 망각, 그 사이는 삶이 숨 쉬는 간격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느라 지치지도 않고, 전부 잊어버려 길을 잃지도 않는 자리. 그곳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도 어제를 견딜 수 있고, 내일을 향해 가면서도 지나온 시간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성숙이란 더 많은 것을 아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흐리게 두어도 되는지를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삶은 비로소 소리 없는 낭만을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