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페이지에는 도망칠 자리가 없다
이 밤이 끝나면,
말이 되지 못했던 마음은
더 이상 그림자나 숨결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은,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과 책임을
함께 얻어야만 했다.
오로라의 눈을 가진 여자가 오른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펼친 채 허공에 멈추자, 보랏빛 머리칼이 어깨에서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낮았고, 분명한 단어를 이루지 못한 채 끊어졌다 이어졌다. 주문은 귀로 들리지 않았다. 공간이 먼저 반응했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던 책장이 소리 없이 갈라졌다. 나무가 움직였다는 감각은 없었다. 대신 별관의 공기가 한 겹 벗겨지듯 밀려났다. 오래 접혀 있던 종이를 펼칠 때 생기는 미세한 저항처럼, 보이지 않는 주름이 풀렸다.
책장 안쪽은 어둡지 않았다. 깊었다.
빛이 없는 곳이 아니라, 너무 많은 빛이 머물다 지워진 곳처럼 느껴졌다. 제목이 닳아 사라진 책들, 표지를 잃은 기록들, 읽히지 못한 채 묶여 있던 페이지들이 층층이 서 있었다. 이곳은 기록이 아니라 잔여였다. 남기려 했으나 끝내 남기지 못한 것들의 집합.
쿼카가 숨을 낮췄다.
“여긴… 분류가 안 된 구역이에요.”
“알아.”
루네는 이미 시선을 안쪽에 고정한 채였다.
“그래서 위험하지.”
여자는 책장 안으로 들어섰다. 발끝이 경계를 넘는 순간, 별관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 균형이 무너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무게가 이동하는 소리였다. 대가를 알고도 선택했을 때만 남는 흔적.
가장 안쪽, 다른 책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놓인 한 권이 있었다. 검은 리본으로 단단히 봉인된 책.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제목도, 이름도. 대신 한가운데, 지워진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긁어낸 흔적이 아니라, 떼어낸 자리였다.
여자의 숨이 짧아졌다.
“… 아직.”
말은 거기서 멈췄다. 그녀는 책을 바라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뻗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결심은 늘 몸보다 늦게 따라온다.
“남겨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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