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침묵이 망가뜨린 밤

by Helia

이 밤이 끝나기 전,
아직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문 너머의 공기는 별관과 달랐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였다. 계절이 아니라 시간을 머금은 공기. 오래된 새벽은 늘 이렇게 방향을 잃은 숨들로 가득했다. 여자는 책을 끌어안은 채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책이 더 무거워지지는 않았다. 대신 몸 쪽으로 바짝 붙어 왔다. 떨어질 수 없게, 도망칠 수 없게.

루네는 문턱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손목에 감긴 달빛 잉크의 흔적이 미세하게 빛났다. 기록은 늘 늦게 반응하지만, 한 번 반응하면 반드시 남는다. 쿼카는 그 흔적을 보고 숨을 삼켰다. 포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이미 이 밤의 방향을 알고 있었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대신 기울어 있었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각도로.

짧은 복도가 이어졌고, 그 끝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표식은 없었다. 다만 손잡이 아래, 같은 자리를 수없이 붙잡았던 흔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긁힌 자국은 오래된 기억처럼 닳아 있었다. 여자는 그 흔적 앞에서 이유 없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발바닥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여기서…”

그녀가 낮게 말했다.

“여기서 멈췄던 적이 있어요.”

루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장소를 고른다. 사람보다 정확해.”

여자는 문 앞에 섰다. 책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검은 리본이 손목을 조였다. 봉인은 경고였다. 이 문을 넘는 순간, 책 안의 첫 문장이 읽히게 된다는 신호.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오로라 같은 눈빛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선택은 늘 이렇게 늦게, 그러나 분명하게 온다.
문이 열렸다.
안쪽은 방이었다. 지나치게 평범한 방. 침대, 책상, 창문. 창밖에는 아직 밤이 남아 있었다. 방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등을 보이는 자세였지만, 여자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알아보지 않으려 애써 왔던 방식으로, 그러나 끝내 알아보고 마는 사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먼저 도착했다. 여자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심장이 빨라졌지만, 숨은 얕아지지 않았다. 몸이 먼저 결심을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그는 책을 보았다. 여자의 품에 안긴 검은 리본의 책. 그리고 다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 사이에서 아주 오래된 시간이 고개를 들었다. 겹쳐진 밤들이 방 안에 겹쳐졌다.

“그건…”

그는 말을 멈췄다. 끝까지 말하지 않은 문장은 이미 수없이 반복해 온 밤의 흔적이었다.

“제가 썼어요.”

여자가 말했다.

“보내지 못했던 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끝이 떨렸다. 떨림은 감정이 아니라 준비였다.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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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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