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배려가 아니다
진짜 친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거리는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체감된다. 예전에는 친하다는 말 하나로 웬만한 불편함을 덮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게 성숙함이거나 배려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친함이라는 말 아래 얼마나 많은 감정이 말없이 지나가 버렸는지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나 역시 단점이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친구의 단점 정도는 그러려니 하며 이해하려고 한다. 관계라는 것은 애초에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감안하며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해와 침묵은 다르다. 단점을 받아들이는 것과 불편함을 삼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둘이 자꾸만 같은 의미로 취급되는 관계 앞에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친한 사이라고 해서 서로를 속속들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비밀이 있고,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마음도 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공유해야만 진짜 친한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와 여백이 관계를 오래 유지시켜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함이라는 감정까지 숨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 표현도 마찬가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주겠거니 기대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결코 알 수 없다. 점술가가 아닌 이상,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친구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불편한 감정을 숨긴 채 스스로는 상대를 배려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상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전달되지 않고, 전해지지 않은 감정은 오해의 씨앗이 된다.
불편함은 관계를 망치기 위해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신호에 가깝다. 마음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작은 경고이고, 지금이라도 방향을 조금만 조정하면 다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표시다. 그 순간에 조심스럽게라도 말해주면 오해는 커지지 않고, 마음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반대로 침묵은 다르다. 침묵은 배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쌓이고 나면 결국 거리가 된다.
우리는 종종 불편함을 말하지 않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괜히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말하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감정은 마음속에 남아 형태를 바꾸고, 언젠가는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확인이라는 이름으로, 질문이라는 형태로, 혹은 타인의 입을 빌린 말로 돌아온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결국 한쪽은 더 조심하게 된다. 말해도 문제가 될 것 같고, 말하지 않아도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은 구조 속에서 사람은 자기 검열을 시작한다. 나 역시 그랬다. 불편한 감정을 느껴도 ‘이건 내가 참으면 될 일인가’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지금 말하면 괜히 관계만 어색해지는 건 아닐까’ 망설이게 되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마음을 접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침묵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 자신을 관계의 중심에서 조금씩 밀어내는 느낌만 남겼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불편한 감정을 숨겼고, 그 선택이 항상 관계를 더 좋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더 분명해졌다. 완벽한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안전함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불편한 감정은 숨기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도 말자. 그 감정은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지고 다뤄야 할 마음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채 상대의 반응을 살피거나, 다른 사람의 말 뒤에 숨어 동의를 구하는 방식은 솔직함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책임을 미루는 일에 가깝다.
완벽하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표현이 서툴러도,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그 순간 느낀 불편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언어로 꺼내 보일 용기는 필요하다. 그래야 관계는 시험대 위에 오르지 않고, 마음은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지 않는다.
진짜 친구란 늘 편안하기만 한 사이는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어색해질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공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불편함을 혼자 삼키게 만들지는 않는 사람, 말하지 않은 감정 뒤에 숨어 상대를 시험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일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다르게 관계를 바라보려 한다. 이해해야 할 단점과, 말해야 할 불편함을 구분하려 한다. 침묵을 배려로 착각하지 않고, 솔직함을 무례로 오해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지우기보다는, 나를 지키면서 이어지는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려 한다.
아마 이것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진짜 친구의 모습일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지만, 불편함만큼은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 정도의 솔직함을 허락하는 관계라면, 오래 함께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