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감보다 먼저 지켜야 할 선
추천 클래식
갈리나 우스트볼스카야 – Symphony No. 5 «Amen» for Solo Trumpet, Tuba, Wooden Cube and Orchestra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고속버스터미널의 소음이 먼저 떠오른다. 출발 안내 방송과 사람들의 발걸음,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 사이에서 나는 용인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창 구직활동을 하던 시기였고, 에버랜드에 T.O가 났다는 말은 충분히 그럴듯했다. “이력서 한 번만 보내봐.” 아는 남자동생의 말은 가벼웠고, 나는 그 가벼움을 의심하지 않았다. 1박 2일 교육이 있다기에 짐도 나름 챙겼다. 그날의 나는 무언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예감에 기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예감은 대체로 가장 위험한 순간에만 그렇게 친절한 얼굴로 다가온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다단계라는 말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그 순간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얘기만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보내주겠다”라고 했다. 그 말은 약속처럼 들렸다. 약속이라는 단어 앞에서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연다. 특히 상대가 ‘동생’이라는 위치에 있을 때는 더 그렇다. 그는 계속 사정했고,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이 나를 용인이 아니라 가락시장 근처로 데려갈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무실은 번듯했고, 사람들은 모두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한 사람이 설명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이어받았다. 말은 바뀌지 않았고, 표현만 조금씩 달라졌다. 꿈, 기회, 시스템, 성장 같은 단어들이 반복되었다. 이해했느냐고 묻고, 이해되지 않으면 다시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나는 더 분명해졌다. 이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같은 이야기를 다른 목소리로 백 번, 천 번 들어도 내 안에서는 ‘아니다’라는 감각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나는 중간중간 그 동생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아마 그는 진심으로 이게 기회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무작정 화를 내거나 비웃을 수는 없었다. 대신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너 약속한 거 잊지 마. 나 얘기 들어줬다.” 그 말은 그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는 선언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더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같은 설명을 백날 전날 해도 나는 이해 못 할 거라고 말했다. 아니, 이해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내 인생 책임질 거 아니면 보내줘.” 차가운 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차가움이 필요했다. 설득보다 나를 지키는 말이 더 중요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다.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남도 아닌 애매한 거리. 그 거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곳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풀면서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 내가 너무 매정했나, 조금 더 들어봤어야 했나 하는 생각들이 뒤늦게 스쳤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 자리를 떠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한 달쯤 지나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짧은 메시지였다. 자기도 현타가 왔고, 결국 그곳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최소한 그의 인생이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내게 호감이 있었고, 가능하다면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날의 장면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데려가려 했는지, 왜 약속을 어기면서도 설명을 꼭 듣게 하려 했는지. 그제야 설명되지 않던 감정의 결이 또렷해졌다.
나는 곧바로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남동생이 있어서인지, 나보다 어린 남자애를 이성으로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를 덧붙였다. “날 속이고 다단계에 데려간 너랑은 그런 관계 생각 없다.” 그 말은 아마도 그에게 꽤 단호하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뢰를 무너뜨린 사람에게 호감이라는 말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좋아해서 그랬다는 말은, 속였다는 사실을 지워주지 않는다.
호감은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상대의 시간을 빼앗고, 판단을 흐리게 하고, 선택권을 침해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날 이후로 나는 관계에도 분명한 선이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말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은 뒤에 꺼내는 호감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돌이켜보면 그날의 나는 여러 번 선택했다. 터미널에서 돌아설 수도 있었고, 중간에 자리를 뜰 수도 있었고, 끝까지 듣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감을 이유로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같은 방향을 택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쪽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쪽. 그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후로 나는 사람의 말을 덜 믿고, 행동을 더 보게 되었다. 진심이라는 말보다, 약속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본다.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보다,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믿는다. 지금은 정말 백만 년쯤 연락이 끊긴 사이가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 그때 거절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나 자신을 조금 잃었을 것이다. 대신 지금의 나는 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그 선택에 동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해해 주었다고 해서, 그 이후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것도.
그날 나는 용인이 아니라 가락시장 근처에서 돌아섰고, 일자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준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나를 속인 관계, 선을 넘은 호감, 책임지지 못할 말들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는다. 안전하게 돌아오는 법을, 그날 나는 분명히 배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