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장|달의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에 대하여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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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Landscape Where Nothing Happens for a Very Long Time
— Nils Frahm


요즘 나는, 잘 살고 있는 건지 멈춰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날들 속에 있다.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확신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버린 상태도 아닌 채로 하루가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밤이 깊어질수록, 말없이 그 자리에 있는 달을 확인하듯이. 달은 언제나 같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성실하게 변하는 존재다. 스스로를 조금씩 비워내고, 다시 채우며 시간을 건너간다. 그 느린 변화 속에서 나는 내 삶의 속도를 비춰본다. 급하게 밝아지려 애쓰다 지쳐버린 날들, 한 번쯤은 어두워져도 괜찮았을 순간들을 지나쳐온 시간들이 겹쳐 보인다.

어릴 적의 달은 그저 밤하늘의 장식이었다. 놀다 늦게 돌아오는 길에 힐끗 올려다보는 은빛 동그라미, 특별한 의미 없이 배경처럼 떠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달은 풍경이 아니라 동행이 되었다. 잠들지 못한 밤,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누군가 말없이 곁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베란다에 서서 숨을 고를 때면 달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떠나지도 않는 존재.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밤은 덜 외로워졌다.

달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루와 달리, 둥글게 돌아 제자리로 오는 길이다. 차오를수록 사라질 준비를 하고, 사라질수록 다시 돌아올 힘을 모은다. 그 반복은 실패가 아니라 순환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사라짐을 끝이라고 오해하지만, 달은 매번 증명한다. 비워내는 일이 곧 다음 빛을 위한 준비라는 것을. 가장 완전해 보이는 순간에도 이미 내려올 길을 생각하고, 가장 어두운 밤에도 돌아올 날짜를 품고 있다는 것을.

삶에도 그런 시간이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들. 성과도 없고, 박수도 없으며, 스스로에게조차 의미를 붙이기 어려운 시기.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 안에서는 방향이 바뀌고 마음의 각도가 조금씩 조정된다. 예전의 나는 그런 시간을 실패라고 불렀다. 내려가는 중인 나를, 기울어지는 나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게 가장 오래 나를 아프게 했다. 하지만 달을 오래 바라보며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무언가는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멈춘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은 차오르는 중일까, 아니면 기울어가는 중일까. 예전에는 그 답이 중요했다. 올라가는 시간에 있으면 안도했고, 내려오는 시간에 있으면 불안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는 것을. 차오름에도 피로가 있고, 기울어짐에도 쉼이 있다는 것을. 중요한 건 방향이 아니라 리듬이었다. 달은 한 번도 자기 속도를 부정한 적이 없다. 빠르지 않다고 조급해하지 않고, 느리다고 멈추지 않는다.

달의 시간은 서두르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하루아침에 원이 되지 않고, 매일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제 속도로 완성된다. 그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정확함에 가깝다. 정해진 만큼만 드러내고, 필요한 만큼만 숨긴다. 억지로 밝아지려 애쓰지도 않고, 어둠을 밀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그 절제 속에서 달은 늘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언제나 밝을 수 없고, 늘 어두울 필요도 없다. 기쁨이 길어지면 피로가 쌓이고, 슬픔이 깊어지면 쉼이 필요해진다. 달의 시간은 감정에도 계절이 있음을 알려준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전부가 아니며, 이 또한 지나갈 한 국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기쁨에 취해 자신을 잃을 필요도, 슬픔에 잠겨 스스로를 부정할 이유도 없다.

어느 날은 달이 유난히 낮게 떠 보일 때가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운 밤. 그런 날에는 마음도 덩달아 내려앉는다. 잊었다고 믿었던 장면들이 불쑥 떠오르고, 오래 묻어둔 이름들이 다시 불린다. 달의 시간은 기억을 부르는 시간이다. 완전히 끝난 줄 알았던 감정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그러나 그 호출은 비난이 아니다. 이제는 다른 눈으로, 다른 마음으로 한 번 더 바라보라는 권유에 가깝다.

달은 늘 밤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낮에도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믿지 않게 되었다.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고, 조용하다고 해서 멈춘 것도 아니다. 달의 시간은 존재의 방식이 꼭 소란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말해준다.

삶의 어느 시기에는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자기 안에서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 달은 그 시간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낸다. 완전히 드러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는 듯이, 흔들림 없이 자기 궤도를 돈다.

요즘 나는 달을 보며 계획을 세우기보다 마음을 내려놓는다. 언제쯤 무엇이 될지 계산하기보다는, 지금 어떤 리듬 위에 서 있는지를 느껴본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고, 늦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 아직 완전하지 않아도 이미 길 위에 있다는 확신. 달의 시간은 나를 느슨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단단하게 한다.

결국 달의 시간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느냐고. 원이 아니어도 괜찮고, 초승이어도 괜찮다고. 중요한 건 멈추지 않고 자기만의 궤도를 돌고 있느냐는 것뿐이라고. 오늘 밤, 창문을 열고 달을 올려다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지금, 당신도 달의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면. 아직 다 차오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속도로 충분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