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길 바라면서도 기다린 것
눈 내리던 1월 어느 주말에, 나는 오지 않길 바라던 것을 맞이했다. 기다림이 늘 설렘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걸, 그 주말에야 또렷이 알았다. 눈이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차라리 오지 않기를 바랐다. 오면 모든 게 달라질 것 같았고, 달라진다는 건 대개 준비되지 않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늘은 늘 인간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는다. 기어이 내리고, 눈은 내리고, 소복소복 하얗게 내려앉았다. 마치 미뤄두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창밖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진 날이었다. 커튼을 조금 열었다가 닫고, 다시 열어 확인하듯 하늘의 기척을 살폈다. 아직은 아닌 것 같다가도,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첫 눈송이가 떨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며 보내는 시간은 이상하게도 느렸다. 평소 같으면 주말이 이렇게 길게 늘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날은 시계가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내리기 전의 공기는 늘 묘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채, 무언가를 앞두고 입을 다문 상태.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바람이 먼저 말문을 닫고, 소음은 뒤늦게 자리를 잃는다. 자동차 소리도, 사람의 발걸음도 눈 속으로 묻힌다. 그 적막 속에서 시간은 더 선명해진다. 시계는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데, 마음은 그 속도를 잊는다. 창문 너머로 하얀 입자들이 질서 있게 내려오는 걸 보고 있노라면, 계절이 아니라 기억이 쌓이는 것 같았다. 오래전에 미뤄둔 말, 하지 못한 선택, 외면해 온 감정들이 눈 결정처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내려앉았다.
주말은 원래 느슨한 시간이다. 해야 할 일의 모서리가 둥글어지고, 급하지 않은 마음들이 늘어진다. 그 느슨함 위로 눈이 내려앉자, 나는 완전히 멈춘 사람이 되었다.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겼고,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었다. 약속을 하나 미뤘고, 연락을 하나 하지 않았다. 신발장 앞에서 외투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대신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컵을 데웠다. 김이 오르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겨울의 중심이 손바닥으로 옮겨왔다. 손이 먼저 풀리고, 그다음에야 마음이 풀렸다.
눈은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은 숨김없는 색이다. 발자국은 남고, 바퀴 자국은 겹치고, 누군가 급히 지나간 흔적은 더 선명해진다. 평소라면 섞여 보였을 감정들이, 흰 바탕 위에서는 또렷해진다. 그래서였을까. 눈을 기다리면서도 오지 않길 바랐던 이유가. 드러남에 대한 두려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눌러두었던 마음들이 눈 위에서는 숨을 곳을 잃는다. 괜찮다고 말해왔던 시간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하얀 풍경이 조용히 증명해 버린다.
창문을 조금 열자 겨울 공기가 밀려들었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몸의 안쪽부터 겨울이 된다. 겨울 공기는 늘 정직하다. 꾸미지도, 포장하지도 않는다. 차갑다면 차갑게, 그대로 닿아온다. 그 공기 속에서 눈은 여전히 내려오고 있었다.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간격을 지키며, 서두르지 않은 채. 나는 그 질서를 오래 바라보았다. 질서란 인간이 만든 규칙이 아니라, 내려오는 것들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도착할 것을 믿고,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
문득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그해 겨울의 나는 눈을 배경으로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웃음은 지금보다 가벼웠다. 가벼운 웃음은 쉽게 흩어지고, 무거운 웃음은 오래 남는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눈이 내리는 동안,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자리에 겹쳐 섰다. 그 사이에 놓인 시간은 눈처럼 말없이 쌓였을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다만, 지나왔을 뿐이었다.
그날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눈길을 걷고 있었다. 눈 위를 걸을 때는 발을 낮춘다. 소리를 줄이고, 균형을 먼저 생각한다. 조심스러움이 습관이 되면 삶의 보폭도 달라진다. 나는 그 보폭을 다시 가늠해보고 싶었다. 너무 조심스럽지도, 너무 성급하지도 않게. 눈 위의 발자국처럼, 다음 걸음을 예고하는 정도로만. 지나치게 깊은 흔적은 금세 얼어붙고, 너무 옅은 흔적은 기억되지 않는다.
해가 기울자 눈의 색이 바뀌었다. 낮의 흰색은 담담했고, 저녁의 흰색은 푸르렀다. 색은 빛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고, 사정은 언제나 변한다. 우리는 종종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한 가지 색만을 요구한다. 하지만 눈은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빛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만큼 반사할 뿐이다. 설명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는 태도. 그 순간의 빛을 그대로 돌려주는 방식이 부러웠다.
밤이 오자 길 위의 발자국들이 굳었다. 낮의 흔적은 밤의 추위 속에서 잠시 고정된다. 그러나 그 고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 날의 햇살이나 또 다른 눈, 혹은 누군가의 발걸음이 덮어버릴 테니까.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남는 흔적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남기기 위해 살지 않지만, 살다 보면 남겨진다. 그것이 기억이든, 문장이든, 누군가의 하루를 잠시 멈추게 한 마음이든.
눈 내리던 1월 어느 주말에, 나는 기다리면서도 피하고 싶었던 것을 받아들였다. 기다림은 끝났고, 회피는 의미를 잃었다. 대신 조용한 수용이 자리를 잡았다. 눈은 내렸고, 내리고, 또 내릴 것이다. 그 사실 앞에서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소복소복 쌓이는 시간에 발을 맞추며, 하얀 여백을 남겨두기로 했다. 여백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자리라는 걸 그 주말의 눈이 가르쳐주었으니까.
당신에게도,
오지 않길 바라면서도 끝내 맞이하게 된 순간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