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살고 있다는 말이, 가장 위험한 이유

멀쩡하다는 말 뒤에 숨겨둔 것들

by Helia

사람들은 안부를 묻는다. 요즘 어때, 별일 없지, 괜찮아. 그 질문들 사이에서 나는 늘 같은 말을 고른다. 멀쩡해. 입에 붙은 말처럼, 생각할 틈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 멀쩡하다는 말은 참 편리하다. 더 묻지 않아도 되고,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 짧은 합의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만큼 속을 숨기기 좋은 단어도 드물다. 멀쩡하다는 말은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 그 정도에 가깝다.

멀쩡하다는 말에는 체온이 없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태. 울고 싶은 만큼 뜨겁지도, 포기할 만큼 차갑지도 않은 애매한 온도. 우리는 그 온도를 오래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씻고 옷을 입고, 해야 할 일을 해낸다. 지각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고, 웃어야 할 때 웃는다. 그렇게 하루를 통과하면 오늘도 멀쩡했다는 증명서가 하나 쌓인다. 누구도 내 얼굴에 금이 갔는지 묻지 않는다. 나 역시 굳이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하지 않는 편이 편하니까.

사실 멀쩡함은 생각보다 얇다. 종이처럼 얇아서 사소한 기억 하나에도 찢어진다. 길을 걷다 우연히 들려온 노래 한 소절, 문득 떠오른 이름 하나, 계절이 바뀌는 냄새 같은 것들 앞에서 멀쩡함은 쉽게 구겨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다린다. 아무 일 없던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아직은 괜찮다고, 지금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멀쩡해야 할 이유는 늘 충분하다. 해야 할 일들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책임들이 있고, 스스로에게 지키고 싶은 체면도 있으니까. 그렇게 멀쩡함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어릴 때는 멀쩡하다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바로 말했다. 울음은 얼굴에 먼저 도착했고, 마음은 숨길 줄 몰랐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는 멀쩡해지는 법을 배운다. 감정을 접는 법, 표정을 관리하는 법, 설명하지 않는 법을 하나씩 익힌다. 사회는 멀쩡한 사람을 좋아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제 몫을 해내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멀쩡한 어른이 된다. 대신 솔직함은 뒤로 밀리고, 진짜 상태는 말끝에서 빠진다.
나는 멀쩡하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문장을 삼킨다. 사실은 많이 지쳤다고, 생각보다 자주 가라앉는다고, 이유 없이 숨이 막힐 때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말들은 꺼내는 순간 설명이 필요해진다. 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그 질문들까지 견딜 힘이 없을 때 우리는 멀쩡하다는 말로 모든 것을 덮는다. 그 말 하나면 충분히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니까.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안부를 물을 때, 멀쩡하다는 말 말고 다른 대답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어도, 조금 흔들리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다는 말 뒤에 바로 해결책이 따라오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면, 그저 그렇다는 상태를 그대로 두어도 되는 관계라면. 멀쩡하지 않은 나를 고치려 들지 않고, 그저 옆에 앉아 있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서는 멀쩡하다는 말을 내려놓아도 될 텐데.

멀쩡함은 목표가 아니다. 완벽하게 괜찮아지는 상태가 아니라, 오늘을 넘기기 위한 자세에 가깝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는 일, 그 정도의 노력. 그래서 멀쩡하다는 말은 대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찮지도 않다. 울지 않고 하루를 건너왔다는 사실,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시간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요구한다. 멀쩡함은 용기다. 아주 조용한 용기.
나는 이제 멀쩡하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려 한다. 그 말 뒤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견뎌낸 흔적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웃으며 멀쩡하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에 얼마나 많은 말을 삼켰는지 모른다. 멀쩡함은 늘 소리가 없다. 눈에 띄게 반짝이지도 않는다. 다만 오늘을 무사히 넘겼다는 사실만 남긴다.
오늘도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 또

멀쩡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직은 숨을 쉬고 있고, 해야 할 일을 해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말이 괜찮다는 선언이 아니라, 계속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라는 것을. 조금 흔들려도, 마음에 금이 가도, 아직은 부서지지 않았다는 확인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멀쩡하게 살아간다. 아주 잘은 아니어도, 아주 나쁘지도 않게.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오늘 당신은 정말 멀쩡한가. 아니면, 나처럼 그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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