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리뷰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은 남을 수 있을까

by Helia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처음부터 잔인한 질문을 건넨다. 하루가 지나면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성립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 질문을 서둘러 답하지 않는다. 대신 같은 하루를 여러 번 되풀이하며,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남겨지는 감정의 결을 하나씩 겹쳐 놓는다. 그렇게 이 작품은 사랑을 증명하려 들지 않고, 사랑이 남기는 흔적만을 조용히 바라본다.

이야기는 기억이 하루 단위로 초기화되는 소녀와, 그 사실을 알고도 곁에 남기를 선택한 소년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이 설정만 보면 감정의 과잉을 예감하기 쉽지만, 영화는 의외로 절제되어 있다. 눈물을 짜내는 장면보다, 눈물을 삼키게 만드는 순간들이 더 많다. 매일 아침 새로 쓰는 메모, 다시 건네는 자기소개, 어제의 자신이 남긴 문장을 오늘의 자신이 처음 읽는 풍경. 사랑은 여기서 사건이 아니라 반복이다. 그리고 반복은 이 관계를 더 애틋하게 만든다. 쌓이지 않는 기억 대신, 쌓여 가는 태도만이 남는다.

이 리메이크가 특히 설득력을 얻는 지점은 배우들의 호흡이다. 옥 씨 부인전에서 천승휘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추영우와,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에서 표남경 역을 맡아 섬세한 감정선을 보여준 신시아는 이 사랑을 과장하지 않는다. 추영우가 연기한 인물은 헌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늘 한 박자 늦게 움직이고,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상대의 하루를 먼저 고려한다. 사랑을 붙잡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이 남길 상처를 미리 헤아리는 얼굴. 그 조심스러움이 이 인물을 더욱 진실하게 만든다.

신시아의 연기는 이 영화의 중심에 가깝다. 기억을 잃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순수함이나 혼란을 표현하는 문제가 아니다. 매일 다른 출발선에 서야 하면서도, 관객에게는 하나의 연속된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신시아는 그 미묘한 균형을 흔들림 없이 유지한다. 오늘의 그녀와 어제의 그녀는 분명 다르지만, 그 차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눈빛의 온도, 말끝의 리듬, 잠깐 멈칫하는 숨결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기록되지 못한 감정임에도, 가장 또렷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점은 클라이맥스가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고백이나 이별처럼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 대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이 마음을 붙든다. 함께 웃고 있는 시간, 그 웃음이 다음 날 사라질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밤.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그 체온이 기억되지 않을 것을 아는 침묵. 영화는 이 침묵을 성급히 채우지 않는다. 오히려 비워둔다. 그 빈자리에 관객의 감정이 스며들도록.

연출 역시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에게 과하게 다가가지 않고, 음악은 감정을 앞서 달리지 않는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는 것은 호흡과 시선이다. 반복되는 아침 장면들은 지루함 대신 쓸쓸함을 남긴다. 어제와 같은 하루가 다시 시작되지만, 그 하루를 대하는 마음은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이 미세한 차이가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조건이 아니다. 기억이 남아야 사랑인지, 미래가 보장되어야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이 영화는 피한다. 대신 사랑의 태도를 묻는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건네는 마음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 선택은 무엇을 감수하게 만드는지. 영화는 답 대신 감각을 남긴다. 그리고 그 감각은 관객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제목은 비극적인 가정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따뜻하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 사랑이 남긴 흔적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다. 기억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하루를 덜 외롭게 만들 수 있다면 그 또한 사랑일 수 있다는 가능성. 이 영화는 그 가능성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엔딩에 다다르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갈림길에 선다. 이 사랑을 아름답다고 부를 것인가, 잔인하다고 말할 것인가. 나는 이 작품이 그 둘 사이에 머물러 있다고 느꼈다. 아름답기 때문에 잔인하고, 잔인하기 때문에 더욱 진실한 사랑. 쉽게 지속되지 않기에 더 단단해지는 감정. 이 영화는 사랑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이 가진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오래 남은 감정은 슬픔보다 감사에 가까웠다.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았던 순간들,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던 마음들에 대한 감사. 우리는 흔히 사랑을 ‘남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을 ‘건네는 것’으로 다시 정의한다. 그리고 그 건넴은 결과와 무관하게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크게 울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생각하게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기억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감수하는 일인지에 대해. 추영우와 신시아의 호흡은 이 질문들을 과장 없이, 그러나 충분히 깊게 전달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보고 나서 끝나는 영화가 아니다. 일상의 어느 순간, 메모지 위의 짧은 문장처럼 불쑥 떠오른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남겨두고 싶은 마음처럼. 그래서 이 영화는 조용히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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