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고양이가 가르쳐준, 곁에 있는 법
고스트캣 앙주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귀여운 고양이가 있을 수 있을까. 그것도 그냥 고양이가 아니라 죽지 않는 고양이 요괴라니. 사람처럼 말을 하고, 스쿠터를 타고 동네를 누비다가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교통법 위반 딱지를 끊기고, 경찰서에 붙잡혀 있는 모습마저 귀엽다니. 이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웃음이 먼저 나오고, 경계는 자연스럽게 풀린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생각보다 깊고 오래 남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앙주는 분명 사랑스럽다. 둥근 얼굴, 느긋한 태도, 인간 세상의 규칙 따위는 대충 넘겨버리는 뻔뻔함까지. 하지만 이 고양이는 단순히 귀여움을 소비하기 위한 캐릭터가 아니다. 죽지 않는 존재라는 설정은 곧 시간을 오래 살아온 감정의 집합체처럼 느껴진다. 앙주는 많이 겪었고, 많이 보았고, 그래서 쉽게 놀라지 않는다. 사람처럼 말하지만, 사람보다 훨씬 말을 아낀다. 그 침착함이 오히려 더 큰 위로가 된다. 괜히 다가와 등을 문지르지도 않고, 필요할 때만 슬쩍 곁에 앉는다. 그 거리감이 너무 정확해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먼저 안도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판타지를 앞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고양이 요괴라는 설정은 분명 비현실적이지만, 영화의 정서는 놀라울 만큼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 상실을 겪은 아이의 하루는 극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아침은 오고, 밥은 차려지고, 학교는 가야 한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마음만 조용히 무너진다. 영화는 그 무너짐을 과장하지 않는다. 울음도, 비명도 없다. 대신 말 없는 장면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솔직하다. 슬픔이란 원래 그렇게 소리가 작다는 걸, 이 영화는 알고 있는 듯하다.
앙주와 아이의 관계는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구도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지켜주는지 명확하지 않다. 앙주는 아이를 위로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머물 이유를 아이에게서 얻는다. 아이 역시 앙주에게 기대지만, 그 기대가 집착으로 번지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설명되지 않은 합의 같은 것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파고들지 않겠다는 약속, 대신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 그래서 이 관계는 유난히 편안하다. 서로를 고치려 하지 않고, 괜찮아지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을 같이 넘긴다.
스쿠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앙주의 모습은 이 영화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급하지 않고, 목적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달린다. 그러다 교통법 위반으로 경찰에게 붙잡히는 장면은 웃음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 사회의 규칙과 요괴의 태평함이 부딪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앙주는 벌을 받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죽지 않는 존재에게 벌점과 벌금은 잠깐의 소동일 뿐이다. 그 태도가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흔들리고, 너무 많은 규칙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가고 있으니까.
작화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오래 바라볼수록 마음에 스며드는 색을 쓴다. 바닷가의 풍경, 저녁 무렵의 하늘, 집 안으로 스며드는 빛의 방향까지 모두 감정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특히 바다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얼굴을 가진다.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매번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존재.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파도가 일고, 금세 다시 고요해진다. 상실 이후의 마음이 꼭 그렇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이유 없이 가라앉고,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이어간다.
이 영화는 죽음을 다루지만 무섭지 않다. 오히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관계에 대해 말한다. 떠났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 형태만 바뀌어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믿음. 앙주는 유령이지만 차갑지 않고, 요괴이지만 위협적이지 않다. 그 존재 자체가 위로의 방식이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순간들이 있다는 걸 이 고양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요즘은 위로가 빠르게 소비된다. 힘들다고 말하면, 더 힘내라는 말이 돌아오고, 괜찮아질 거라는 문장이 덧붙는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당장 괜찮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이 영화는 그런 상태를 존중한다. 나아가라고 재촉하지 않고, 감정을 정리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울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기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여유.
고스트캣 앙주는 보고 나서 바로 정리되는 영화가 아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감정은 쉽게 정돈되지 않는다. 대신 며칠 뒤, 별일 없는 순간에 불쑥 떠오른다. 길에서 고양이를 봤을 때, 저녁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질 때, 괜히 마음이 가라앉는 밤에. 그때 문득 앙주가 생각난다. 스쿠터를 타고 태연하게 지나가던 모습, 경찰서에서조차 느긋하던 표정, 말없이 곁에 앉아 있던 뒷모습.
이 영화는 크게 울리지 않는다. 대신 오래 남는다. 감정을 흔들어 깨우기보다, 조용히 옆자리에 앉는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지금 당장 위로가 버거운 사람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기 싫은 사람에게, 이 영화는 좋은 동반자가 된다. 보고 나면 삶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루를 대하는 호흡이 조금 느려진다. 그 정도 변화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