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눅한 계절이 건네는 마음의 속삭임
여름이면 때마다 찾아오는 불청객, 나에게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햇살을 가려버린 회색 구름은 마음까지 눅눅하게 적시고, 매일을 두들기는 빗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위로가 아닌 피로가 된다. 빨래는 마를 줄 모르고, 창문은 자꾸만 닫혀만 간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내 마음도 덩달아 눅눅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장마 속에서만 피어나는 감정도 있다. 차오르는 습기 속에서 오래 묻어둔 생각들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미뤄둔 감정들이 빗물처럼 스며든다. 장마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어쩌면 그 불편함 덕분에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맑은 날엔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처럼.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
문득 어떤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잠깐의 정적, 그 사이로 스며드는 지난 시간들.
비는 다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서늘함 속엔 묘한 정직함이 있다.
억지로 웃을 필요도, 애써 무던한 척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꺼내도 괜찮은 날.
장마는 나에게 그런 허용을 준다.
그래서일까.
나는 언제부턴가 이 눅눅한 계절을
단지 ‘싫은 것’이라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축축한 공기 속에 퍼지는 커피 향이 반갑고,
창밖을 바라보며 머물 수 있는 시간도 고맙다.
비 때문에 미뤄진 약속이,
오히려 내 마음을 돌아볼 여백이 되기도 한다.
장마는 내 삶에 쉼표 같은 계절이다.
쉴 새 없이 달려온 나날들 사이에서
비로소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추어 내가 얼마나 젖어 있었는지를 알아차리는 시간.
그리고 그렇게 적셔진 마음 위로,
또 한 번 새로운 생각이 피어난다.
불청객이라 여겼던 장마가
결국엔 내 안의 문을 조용히 열어주는 손님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밝고 뽀송한 마음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어떤 감정들,
비를 통해서야 비로소 흘러나온다.
조금은 눅눅하고,
조금은 서글픈,
그러나 진심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들.
그리고 나는 그런 마음을
장마 속에서 다시금 꺼내어 마주한다.
비에 젖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고요한 감정의 울림,
나 자신에게 건네는 작은 속삭임.
그 모든 것이, 장마 속에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