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마주친 봄꽃

나는 왜 그 앞에서 멈췄을까

by Helia

서점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책 보다 먼저 꽃을 보았다. 애초에 그날 내가 찾으려던 것은 특정한 제목도, 작가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저 습관처럼 문을 밀고 들어왔을 뿐인데, 계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종이 냄새와 잉크의 잔향이 엉겨 있는 공기 속에서, 봄은 소리 없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계산대 옆 작은 테이블 위, 투명한 유리병에 꽂힌 몇 송이의 꽃. 꾸민 흔적도, 설명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왜 하필 서점에서였을까. 왜 나는 그 꽃을 지나치지 못했을까.

서점은 늘 조용하지만, 그날의 정적은 조금 달랐다. 숨을 크게 쉬면 방해가 될 것 같아 자연스럽게 호흡을 낮추게 되는 공간. 책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꽃이 깨어 있는 느낌 때문이었다. 꽃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책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거기 있었다. 마치 이곳에 놓일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나는 그 자연스러움이 마음에 걸렸다. 일부러 만든 장면이 아니라는 점에서.

서점에 들어오면 나는 늘 속도를 늦춘다. 책등의 색을 따라 시선을 옮기고, 제목과 제목 사이의 공백을 읽듯 훑는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지만, 꽃 앞에서는 시간이 유난히 늘어졌다. 활자를 고르러 왔던 눈이 꽃잎의 결을 더듬고, 문장을 찾던 마음이 색의 농담을 헤아렸다. 보통은 글자가 읽히고 꽃은 보인다고 말하지만, 그날의 꽃은 분명히 읽히고 있었다. 봄이라는 단어가 사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손 닿을 듯 가까운 자리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듯.

꽃은 늘 계절의 앞자리에 선다. 사람보다 먼저 계절을 알아보고, 사람보다 먼저 계절을 살아낸다. 서점이라는 장소가 더해지자 그 사실이 더욱 선명해졌다. 책은 시간을 눌러 담은 물건이고, 꽃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존재다. 하나는 붙잡고, 다른 하나는 놓아준다. 그 둘이 같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여 있다는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붙잡고 싶은 기억과 흘려보내야 할 감정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꽃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을 아는 순간, 꽃은 설명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대신 그날의 빛을 기억했다. 유리창을 통과한 오후의 햇살이 꽃잎 위에 얹혔다가, 잠시 머물고는 사라지던 순간. 같은 빛이 책장 위를 지나고, 나무 바닥의 결 위를 미끄러지듯 흘렀지만, 꽃 위에서만 유독 느리게 보였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일 것이다. 봄은 늘 바쁜 척하지만, 우리가 붙잡아주면 잠시 멈춰 서준다.
서점에는 계절이 천천히 도착한다. 거리의 현수막이나 쇼윈도의 장식보다, 신간 코너의 색감보다 먼저 변하는 것은 계산대 옆의 작은 자리다. 겨울 동안 비어 있거나 무심했던 곳에 어느 날 갑자기 꽃이 놓인다. 그 변화는 선언처럼 요란하지 않다. 다만 이미 봄이 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만들 뿐이다. 나는 그 조용함이 좋았다. 세상이 앞다퉈 봄을 외칠 때, 서점은 아무 말 없이 봄을 앉혀두는 곳이니까.

꽃 앞에 서 있다가 문득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애초에 고르려던 책은 아니었다. 꽃이 놓인 테이블과 가장 가까운 선반에 있던 책. 표지의 색이 꽃잎과 닮아 있었다는, 그 정도의 이유였다. 서점에서의 선택은 대개 그런 식이다. 논리보다 기분이 앞서고, 필요보다 마음이 먼저 손을 뻗는다. 그날의 꽃은 나에게 그런 선택을 허락해 주었다. 오늘은 이유 없이 골라도 괜찮은 날이라고.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가 다시 꽃을 보았다. 활자 사이로 봄이 스며들어, 문장 끝마다 작은 쉼표처럼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아직 낯선 이야기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말처럼 다가왔다. 처음 읽는 문장인데도 이미 여러 번 읽은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 아마도 꽃이 먼저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꽃 앞에서는 누구나 조금 느슨해진다. 서점이라는 가장 단정한 공간에서도.

요즘 나는 계절을 제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가 하루를 밀어내듯 흘러가고, 달력만 넘기며 시간을 짐작했다. 봄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실제로 봄을 만났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의 꽃은 마치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미뤄두었던 감정들, 아직 손대지 않은 마음의 온도를 조용히 불러내면서.

우리는 서점에서 정말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책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계절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계절 속에 남겨두고 온 감정 하나. 바쁘다는 이유로 흘려보낸 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 날들을 책 사이에서 다시 발견하고 싶어 하는 마음. 그날 서점에서 마주친 봄꽃은 그런 마음을 정확히 짚어냈다. 아직 괜찮아지지 않은 것들, 언젠가는 다시 손에 쥐고 싶었던 것들을 말없이 꺼내 놓았다.

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서점에 놓인 꽃도 언젠가는 시들고, 다른 계절의 장식으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장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한쪽에 끼워두는 책갈피처럼 남아, 필요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이 된다. 나는 계산을 마치고 서점을 나서며 뒤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고 있었다. 계절은 늘 그런 식이다. 우리에게 큰일을 해주고도, 생색내지 않는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거리에도 봄이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서점 안에서 본 꽃이 더 또렷하게 남았다. 아마도 책과 함께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읽히는 것과 피어나는 것이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이 된다. 끝나지 않은 문장, 아직 이어질 여지가 많은 문장. 나는 그 문장을 가슴에 품고 천천히 걸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서점에 들어갈 때, 먼저 책이 아니라 계절을 찾는다. 서점에서 마주친 봄꽃은 그렇게, 조용히 나의 하루를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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