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는 건 AI이고, 남는 건 사람이다
소설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AI는 반드시 멈춘다. 자극적인 대사, 불편한 감정, 인물이 끝내 넘어서는 선 앞에서 AI는 조용히 물러선다. 그것은 윤리적 판단이라기보다 구조적인 한계에 가깝다. AI는 안전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며,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지점을 미리 피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가장 날것의 순간, 인물이 자기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장면에 이르면 AI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내가 직접 써야 한다. 대신 써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소설에 자극적인 대사나 장면이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창작이라는 점이다. AI는 그런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감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자리는 비워 둔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일은 결국 사람에게 돌아온다.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하는 문장을 쓰는 일. 그 책임을 지는 건 언제나 작가다.
AI를 쓰면 창작이 흐려진다는 말은, 실제로 소설을 써본 경험과는 조금 어긋나 있다. AI는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쓰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방향을 주지 않으면 아무 방향으로나 흘러간다. 인물의 성격은 쉽게 흔들리고, 장면은 그럴듯하게 이어지다 갑자기 맥락을 잃는다. 감정은 설명으로 대체되고, 말은 많아지지만 의미는 옅어진다. 그래서 작가가 개입하지 않은 문장은 안전할 수는 있어도 살아 있지는 않다.
소설은 문장을 잘 이어 붙이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지, 어디까지 밀어붙이고 어디서 멈출지 끊임없이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 선택의 무게를 AI는 짊어지지 않는다. AI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그 결과가 남긴 흔적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극적인 장면일수록, 윤리적으로 애매한 대사일수록, 인간의 욕망과 비열함이 드러나는 순간일수록 작가의 손을 떠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이 지점에서 안도한다. AI가 모든 걸 대신 써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멈춰 서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내가 온전히 소설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입에 어떤 말을 올릴지, 그 말을 읽는 누군가가 어떤 감정을 겪게 될지 상상하며 직접 문장을 고르는 시간. 그 시간이 빠져버린 소설은 아무리 매끄러워도 결국 텅 빈다.
AI를 쓰는 행위 자체를 두고 창작의 진위를 따지는 시선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논쟁은 종종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친다. 어쨌든 AI라는 것도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선택과 판단 위에서만 작동해 왔다. 연필도, 워드프로세서도, 맞춤법 검사기도 처음에는 같은 의심을 받았다. 도구를 쓰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도구보다 사람의 의도가 더 중요해졌을 뿐이다.
게다가 이제는, AI를 한 번도 쓰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쓰고 끝난 사람은 거의 없다. 편의성과 효율 앞에서 사람은 언제나 다시 도구를 찾는다. 중요한 건 사용 여부가 아니라 사용 방식이다. 어디까지 맡기고, 어디서부터 직접 쓸 것인지 스스로 정하는 일. 그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AI를 쓰면 글은 쉽게 흐려지고, 기준이 분명한 상태에서 쓰면 오히려 작가의 목소리는 또렷해진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쓰면서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가장 쓰기 어려운 문장, 가장 불편한 대사, 끝내 피할 수 없는 장면 앞에서 멈춰 서는 그 순간이야말로 창작의 핵심이라는 것을. AI는 그 자리를 비켜가지만, 나는 그 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한다. 소설 속에 남은 자극과 불편함, 찝찝함은 그래서 늘 작가의 몫이다.
AI는 안전한 글을 만들 수는 있어도, 위험한 글을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그 책임을 지는 존재는 여전히 사람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 남아 있는 날것의 문장들은, 내가 직접 썼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그 문장을 쓰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결국 창작은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감당의 문제다. 그리고 그 감당은 아직, 사람의 영역에 남아 있다.